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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시계태엽 오렌지, 스탠리 큐브릭] 영화리뷰

by jundoll 2021. 8. 8. 19:11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연출하고

맬콤 맥도월 등이 연기한다.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는 1971년에 개봉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차기작이자 1962년 앤서니 버지스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다. 프랑스 작가주의 형식에 많은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서 기존 영화를 답습하지 않은 독창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슬로우 모션, 1인칭 시점 카메라 워킹, 초현실적인 연출, 명화에 모티브를 둔 시퀀스 등 놀랍도록 화려한 장면이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으며 주인공과 그 친구들이 사용하는 독특한 말투(nadsat)는 영화의 독창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훌륭한 언어적 요소로서 작용한다. 그리고 나에게 이 영화는 독창적이다 못해 독보적이기까지 하다. 처음 이 영화를 접했을 때가 아직도 선명하다. 언젠가 웹서핑을 하던 도중 어떤 평론가의 만점 목록에서 이 영화를 봤던 기억이 있다. 아쉽게도 그 평론가가 누군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날 그 글은 나에게 영화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거대한 시작점이 되었다.

 

이 영화는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전개로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다. 언제까지고 승승장구할 것만 같은 주인공 알렉스(맬콤 맥도월)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하고 끔찍한 범죄행각도 서슴지 않는 교활하고 악한 인물이다. 친구들과 함께 노숙자를 집단 구타하기도 하고 다른 패거리와 패싸움도 일으키며 아무런 죄 없는 작가의 집에 무단 침입하여 강간, 강도, 폭행 등의 악랄한 범죄도 일으킨다. 범죄도 범죄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더 소름이 끼친다. 왜 이렇게까지 보여주나 싶을 정도로 적나라한 범죄의 묘사는 보는 이에게 불쾌감은 물론 알 수 없는 두려움까지 함께 전달한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는 법. 알렉스의 권위적인 행동에 지친 친구들은 그를 함정에 빠트려 감옥에 가게 하고 그는 감옥에서 '루드비코 실험'에 참여하게 된다. 루드비코 실험은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장면을 보거나, 상상하거나, 직접 행동했을 때 구토를 유발하게 하는 일종의 조건반사를 심어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나에게 있어 이 영화가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가 시작되고 근 1시간동안은 알렉스와 친구들의 종횡무진 범죄행각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실 적나라하다는 말이 그 장면들을 다 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일반적이지 않은 폭력묘사는 어떠한 희망도 없을 것 같은 무기력한 피해자와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것 같은 익살스러운 가해자의 모습에서 기인한다. 알렉스와 친구들은 연속으로 범죄를 일으키지만 그들은 그런 행각을 할 때 가장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삶에 아무런 기대가 없는 소위 막장인생들이 벌이는 행각은 보는 이에게 본능적인 거부감과 생존을 위한 회피감까지 일으킬 정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막 피가 이리저리 튀고 절단된 신체의 부분이 굴러다니는 묘사가 나오는 것도 아니며 귀신이나 좀비, 악마나 혼령 따위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심신이 약한 사람은 반드시 시청을 피하라고 얘기하고 싶다. 원래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인데 이 영화의 악당들은 모두 건강하고 힘이 넘치는 사내들이다. 그 건장한 인간의 실루엣이 공포심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감독은 왜 이렇게까지 극악무도한 범죄행각을 낱낱이 보여줬을까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들이 악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기엔 너무 과하고 자극적인 장면을 넣고 싶었다기엔 무책임해 보인다. 그러나 그 의문은 위 사진의 의사가 루드비코 실험의 목적을 설명하는 순간 명확해지기 시작한다.  

 

실험의 개요를 설명하는 시퀀스에서 담당 의사는 이 실험의 과정, 목적, 효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 때, 시퀀스의 표현은 화면에 꽉 찬 의사의 단독샷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꼭 비단 알렉스뿐만이 아닌 또 다른 누구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의미심장한 장면을 보면서 나는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의사가 진행하려고 하는 이 실험의 대상이 알렉스가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나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 자체가 관객을 대상으로 한 커다란 '루드비코 실험'이라는 것이다. 그 가설에 비추어 영화를 바라보면 1시간가량 지독히 사실적이었던 폭력을 굳이 표현했던 이유가 설명된다. 감독은 영화적인 표현을 제한한 실제같은 폭력묘사를 통해 실은 그것이 아주 불편하고 불쾌한 것이라는 생각을 무의식 속에 심어줬던 것이다. 폭력은 이토록 잔인하고 끔찍하며 이는 전혀 유쾌하거나 통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 스스로 폭력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이고 알렉스와 같은 불한당들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일깨워주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게다가 이런 가설을 영화 외적인 부분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때 당시는 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베트남전의 발발, 냉전시대의 초조함 등이 배경으로 작용하여 기존의 질서에 전적으로 반발하는 대항문화가 들끓던 시기였던 만큼 온갖 비이성적인 행위가 서구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감독인 스탠리 큐브릭은 이 영화를 더 많은 청소년들이 보기를 바랐고 영국 영화심의위원회는 무삭제판으로 상영을 지지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그저 나의 푼크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감독이 어떤 생각으로 연출했는지는 당연히 나도, 너도,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위와 같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영화 내외적 요소들은 영화의 반절을 차지하는 잔혹한 폭력묘사에 대해 어떤 공익적인, 학습적인 함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의심하게 한다. 

 

 

루드비코 실험을 통해 새사람이 됐다고 해도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온 알렉스는 출소 후에 온갖 고초를 겪는다. 부모님은 더 이상 알렉스를 돌봐주지 않고, 주변의 시선은 따가우며, 한 때 함께 범죄를 저질렀던 친구들에게 린치를 당하기도 한다. 비참함의 끝을 달리던 알렉스는 이리저리 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 때 자신이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그 작가의 집에 당도한다. 작가는 마침 반정부적인 성향으로 정부의 비인간적인 정책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단체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작가는 알렉스의 정체를 꿰뚫고 필요한 정보를 모두 빼낸 뒤 그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감행한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허우적대던 알렉스는 끝내 창문 밖으로 몸을 내던져 비참한 삶을 끝내려고 한다. 그러나 질긴 생명력으로 목숨을 부지한 알렉스는 병원에 입원했고 온갖 정치인과 기자, 부모님은 정치적 화두의 중심에 서있는 알렉스에게 다시 이전처럼 대하기 시작한다. 루드비코 증상을 없애기 위한 심리 치료가 시작되고 알렉스는 다시 선정적인 상상이 가능한 몸으로 되돌아왔으며 마지막 장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완전히 치료되었어."

 

이 결말은 기존의 소설의 결말과는 정반대 양상을 띄고 있다. 실제로 폭력성이 잠재워져 새사람이 된 알렉스의 모습으로 끝나는 소설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추악한 정치적 목적으로 인해 기존의 폭력성을 간직한 알렉스로 돌아온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인간이 행하는 폭력의 잔혹성을 적나라하게 일깨워줬던 계몽적인 연출과는 반대되는 암울한 양상인 것인데, 여기서 나는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진정으로 전달하고 싶은건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느꼈다. 감독은 우리가 바뀌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감독은 우리에게 분명 당신들은 영화의 중반까지 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가졌을 테지만 결국 거대한 자본과 어두운 정치에 휩쓸려 같은 곳으로 돌아가 같은 자세를 취할 것이라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원작과 가장 차별을 둔 이 부분에서 감독은 희망적 미래를 꿈꾸기보다는 더러운 힘에 좌우되는 무기력한 미래를 예상하고 있었다. 감독은 인간의 악한 자유의지가 불러 일으킬 문제들은 당최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라는 자신이 결론지은 답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무섭고 암울한 결론이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앞으로의 사회가 보여줄 양상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던 감독의 통찰력이다.

 

 

그런 무거운 메시지를 가졌음에도 영화의 미적인 연출과 미술은 당대의 기준을 가뿐히 뛰어넘고 있다. 7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화려한 카메라 워킹과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을 가지고 있고 완벽주의자인 감독의 성향이 뚝뚝 묻어 나올 만큼 영화의 완성도가 높기도 하다. 그러나 작품성과는 별개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 영화기도 하다. 영화를 본 뒤 모방범죄가 들끓었다고도 하고, 큐브릭 감독이 죽기 전까지 영국에서의 상영이 금지되었다고도 하고, 온갖 음모론에 휘둘리기도 한다. 어떤 의미로는 예술적이고 어떤 의미로는 외설적이다. 누구는 최고의 영화라고 일컫고 누구는 중간에 꺼버리기도 한다. 화려하면서 끝없이 우울한, 미래적이지만 또 다분히 암울한. 그 한끝 사이에 위치한 이 극악무도한 작품은 분명 어떤 시선에서든 의미가 있는 영화임은 틀림이 없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 큐브릭 감독의 답에 반박할 여지를 찾지 못했다. 아직도 인간의 악한 자유의지는 남에게 막심한 피해를 끼치고 거대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분명 냉전시대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국제적 갈등은 깊지 않지만 어쩌면 그것보다 더 넓은 단위인 인종이나 성별 같은 분야에서 용암같이 뜨거운 문제가 발화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해결방법을 모르고 심지어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불확실한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자신이 가진 해결방법을 끊임없이 세상에 내보내는 창작자의 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이끌어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긍정적인 표지판임은 분명해 보인다.

 

 

 

[A Clockwork O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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