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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바이센테니얼 맨, 크리스 콜럼버스] 영화리뷰

by jundoll 2021. 8. 8. 22:31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이 연출하고

로빈 윌리엄스, 엠베스 데이비츠 등이 연기한다.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은 인간이 되고픈 로봇의 일대기를 다루는 영화다. 로봇에 대한 이야기니 당연히 SF 장르가 짙게 깔려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 장르에 더 가까운 양상을 보인다. 인간의 삶을 동경하여 인간이 되고 싶고 인간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으며 인간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싶은 로봇 앤드류(로빈 윌리엄스)의 모습을 보면 타 SF장르의 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기계의 반란'이라던가 '안드로이드의 정복'같은 불안한 미래상과는 다소 다른 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앤드류는 다른 로봇과 달리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자신이 모시던 주인집 막내딸의 유리인형을 망가뜨린 앤드류는 스스로 목공 술을 터득해 비슷한 모양의 나무인형을 만들어낸다. 이 일을 시작으로 점점 많은 것을 알아가는 앤드류의 모습은 마치 새로 태어난 아이가 시간이 지나며 사회화되는 과정을 보는 것 같은 미묘한 기분을 안겨준다. 앤드류는 많은 일을 겪고 그와 정비례하게 더 많은 것을 갈망하게 된다. 처음엔 생각을 갖고, 이후엔 감정을 가지며, 더 지나니 얼굴을 갖고 싶고, 나중엔 스스로를 규정하고 싶어 한다. 마치 현대 이전의 인간사가 그러했듯 앤드류는 '자유'를 원하는 경지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자유는 '나'에 의해 스스로 일어나는 자의적 현상이기 때문에 삶의 최종 목표는 될 수 없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타인의 인정이었다. 자신이 그들과 같은 용모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주길 바라고, 자신이 그들과 같이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인정해주길 바라며, 사랑하는 포샤(엠베스 데이비츠)와의 결혼을 인정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세상은 쉽게 앤드류를 같은 사람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로봇의 불멸은 인정할 수 있으나 사람의 불멸은 인정할 수 없다는게 그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요즘 세상에도 트랜스젠더를 트랜스한 성별로 인정해주냐 해주지 않느냐 같은 논제나 이민자의 국적을 인정해주냐 해주지 않느냐 같은 논제들로 많은 토론과 공판이 열리고 있다. 지금은 비록 영화속 한 장면이지만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나 현실 세계의 로봇이 자신을 인간으로 인정해달라는 목소리를 내게 되면 과연 인간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하게 된다. 

 

 

사회의 인정을 얻지 못한 둘은 비공식적인 결혼 형태, 동거인으로서 많은 세월을 함께하게 된다. 그들은 분명 행복했을테지만 끝내 해결되지 못한 찜찜함이 언제나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이 영화를 보는 '인간'들에게 많은 애석함을 전하는데, 결국 인간은 타인의 인정 없이는 불완전한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고 이는 종족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싶은, 그리고 자신들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인간의 모순을 은연중에 표현하고 있다. '로봇' 앤드류는 점점 늙어가는 포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유한한 삶을 얻어야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참 아이러니하다. 과거의 진시황이나 영화 속 무수한 인물들은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데 앤드류는 삶을 마치고 싶어 한다. 결국 몸도 마음도, 생명의 기한도 인간과 같은 모습이 된 그는 생이 끝날 때가 돼서야 인간으로 인정받게 되어 포샤와 공식적인 부부가 된다. 이는 자그마치 200년, bicentennial의 시간이 걸린 일이었으며 '로봇'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생을 마감한 앤드류의 표정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영화는 1999년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 힘들만큼 현대적인 시선으로 로봇과 인간의 세상을 다루고 있다. 로봇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하며 인간은 로봇을 배척하고 싶어 한다. 물론 그 과정이 기존의 하드 SF 장르를 따라가고 있지 않아서 큰 거부감이 들거나 하지는 않고 오히려 따듯하고 건강한 색채로 표현하기 때문에 진중한 사유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또, 영화에서 표현되는 미래에 대한 상상은 가끔은 귀엽고 가끔은 발칙하여 미래의 삶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주기도 한다. 잔잔한, 그러나 가볍거나 유치하지 않은 독특한 SF 드라마 장르의 좋은 표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로봇이 겪는 한 사건이 아니라 로봇에서 인간으로 진화(?) 하기 위한 200년의 시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서사가 급히 진행되는 감은 있다. 몇십 년씩 건너뛰기도 해서 앤드류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정 붙일 틈도 없이 나이를 먹는다. 그럼에도 크게 구멍나지 않은 전개와 오버하지 않는 연출, 억지적인 갈등이나 감동이 나오지 않는 덕에 심히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다. 잔잔한 호수 위에 떠 있는 기계로 만들어진 청둥오리를 보는 것 같은 영화랄까.

 

 

영화는 인간이 만들었으니 당연히 인간적인 시각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모든 것은 인간의 입장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영화는 앤드류를 통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과 지성, 감각과 개성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 일깨워주기도 한다. 로봇 앤드류는 지금 우리가 그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얻기 위해 200년의 세월을 바쳤고 이는 그를 사람으로 만들어준 루퍼트(올리버 플랫)의 "Welcome to the Human Condition!"같은 유머러스한 대사에서 더 처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나중에 로봇이 어떤 생각을 갖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바이센티니얼 맨]을 보며 깔깔 웃을 수도 있고 인간들을 향해 너네 너무 자만하는 거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혹은 죽어가는 인간을 비웃으며 영생을 맘껏 누릴지도 모른다. 이미 로봇과 관련된 많은 발전이 있었고 앞으로는 더 빠른 속도로 개발될 것이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는 1999년에 개봉된 이런 영화를 보며 자신이 자연스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인류가 이뤄온 업적에 감사해야 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사회의 만들어짊에 감사해야 한다. 물론 -이 영화를 추천해준 내 여자친구처럼- 혹시 모를 로봇들의 반격에 대비해 언제나 빅스비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Bicentennial Man]

서사 ★★★
연출 ★★★★
대사 ★★★★☆
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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