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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 영화리뷰

by jundoll 2021. 7. 28. 03:33

 

 

박찬욱 감독이 연출하고

송강호, 신하균, 배두나 등이 연기한다.

 

[공동경비구역 JSA]로 대박을 친 박찬욱 감독의 차기작, 박찬욱 유니버스 복수 3형제의 맏이, 정통 하드보일드 범죄 영화 [복수는 나의 것] 되시겠다. 이 영화는 간추려 설명하자면 '찬욱이 형 하고 싶은 거 다 해'다. 당시 [공동경비구역 JSA]로 주가가 치솟은 찬욱이 형은 이 때다 싶었는지 이런 무시무시한 괴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복수는 나의 것]에 자비라는 개념은 없다. 또, 용서라는 개념도 없다. 오직 복수라는 개념만 여실히 존재한다. 특히 이 영화의 복수는 행함과 당함이 수건 돌리기 같은 방식으로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그 연속성으로 인해 더 처절한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잔인하다. 잔인과 잔혹은 다르다. 잔혹하다는 것은 어떤 유의미한 감정, 즉 상대에게 벌을 주기 위해 행하는 사람이 애를 쓰고 있고 알 수 없는 모종의 관계가 포함된 느낌이 든다. 더 혹독하고 지독한 비극을 선사하기 위해 애쓰는 느낌이다. 그러나 잔인하다는 것은 일말의 정 없이(여기서 말하는 정은 '상대방에 대한 생각'이다) 그저 행하는 사람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당하는 사람을 무자비한 냉혹감으로 해치는 느낌이 난다. 아무리 싹싹 빌어도 절대 봐주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행위를 위한 행위, 복수를 위한 복수. 그런 의미로 이 영화는 극히 잔인하고 건조한 면을 가지고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 나오는 복수들은 그저 해야 하니까, 그게 마땅하니까 진행된 일련의 절차일 뿐이다.

 

물론 감정이 아예 배제된 기계들의 혈투가 아니니 당연히 행함과 당함의 인과관계에 뜨거운 감정은 포함되어 있다. 으레 복수극이라고 함은 당한 자가 행한 자로 바뀌는 순간에 느껴지는 상쾌한 감정을 전달해야 극이 종료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다른 복수극과 달리 유난히 그런 감정이나 어떤 복수의 쾌감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류(신하균)에게 복수를 성공한 동진(송강호)이 끝내 영미(배두나)가 속해있던 의문의 단체에게 또 다른 복수를 당하고, 이는 복수의 아이러니를 표현한 것이기에 그런 감정의 부재가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영화 전반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복수들에 전혀 후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는 없다. 적어도 류가 자신에게 사기를 친 장기매매꾼들을 무참히 살해할 때라도 그런 감정이 느껴져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영화가 계속될수록 점점 불쾌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모든 감정에는 원인이 있는 법이다. 그것은 눈에 쉽게 보여서 아주 명확할 수도, 혹은 꽁꽁 숨겨두어 직접 찾아야 할 수도 있다. 앞서 말한 '복수의 아이러니'는 아주 명확한 원인이다. 그렇다면 그 감정을 더 증폭시킨 숨겨진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영화의 '계절'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에 대한 설명을 복수 3부작의 막냇동생 [친절한 금자씨]와 비교하며 설명해보고자 한다. 

 

 

여름은 습하고 겨울은 건조하다. 또,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 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수박과 에어컨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또, 추운 겨울에는 따듯한 어묵 국물과 히터가 그렇게 절실하다. 그러나 반대로 여름에 뜨거운 어묵 국물을 마신다거나 추운 겨울, 계곡 물속 차가워진 수박을 통째로 먹는다면 어떨까. 혹은 에어컨과 히터가 고장 나 반대의 기능만 한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딱히 살고 싶지 않다. 그러니 다양한 계절은 그만큼의 다양한 감정을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자연의 원칙이고 섭리이며 우리는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인간들은 생각할 수 있는 지능이 있고 행동할 수 있는 팔다리가 있다.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그래서 인간들은 아주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또 발명했다. 앞서 말한 수박과 어묵 국물, 혹은 에어컨과 히터는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면서도 그 와중에 삶의 질을 높이려고 하는 나름의 해소법인 것이다. 또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약소한 반항인 것이다. 그렇게 인간들은 작지만 효과적인 이 '계절 반항심'을 관습화 시켜오면서 이제는 건방지게도 아주 당연히 '여름을 시원하게', '겨울은 따듯하게' 보낼 생각을 하고 있다.

 

세상을 투영하는 매체인 영화에서도 이 '계절 반항심'은 빠질 수 없다. 여름에 공포영화가, 겨울에 로맨스 영화가 성행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위의 이론으로 [친절한 금자씨]를 보자. 배경은 겨울이다. 그러나 동사할 정도의 겨울은 아니다. 오히려 함박눈이 내리고 눈이 차곡히 쌓여있는 모습이나 따듯한 실내의 모습도 자주 보여준다. 그러니 이 영화는 아무리 복수 3형제의 막냇동생이라지만 '복수'보다 '용서'에 초점을 더 맞추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만약 '복수'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면 그 쓸쓸하고 냉혹한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온갖 더러운 광경 즉, 도로 위의 블랙아이스라던가 빗발치는 싸라기눈이라던가 창가를 뒤덮은 불투명한 서리들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친절한 금자씨]는 비록 추운 겨울 속 일어나는 처절한 복수를 다루지만 그 이면엔 착한 복수를 이룬 금자씨의 영혼과 앞으로 가족과 함께 일궈나갈 미래를 따듯하게 응원하는 영화다. 그리고 그런 은은히 표현되는 '계절 반항심'은 겨울에 먹는 뜨끈한 호빵 같은 쾌감을 선사하여 영화가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 [복수는 나의 것]의 계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계절은 여름이다. 그것도 아주 습하고 에어컨 바람 하나 나오지 않는 여름. 모두가 뜨거운 온도에 지쳐 땀을 흘리고 헥헥거리고 있는 그런. 거기에 장르는 복수극이다. 그렇다면 간단히 생각해보았을 때,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모종의 '쾌감'(윤리성은 차치한)을 느끼려면 더위(혹은 상대방)에게 날리는 통쾌한 한 방을 보거나 땀을 식혀줄 시원한 공기(혹은 처절한 감정의 해소)를 쐬어야 한다. 대표적으로 시원한 목욕, 선풍기와 에어컨, 수박의 아삭함, 계곡과 바다, 온 힘을 다한 펀치, 폭죽과 환호성 등이 이 역할을 맡고 있다. 앞서 말했듯 '계절 반항심'은 관습화 되어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표현을 필요로 한다. 만약 감독이 관객들에게 여름날의 더위를 잊게 해 주려고 '바나나 먹는 모습'을 일부러 연출했다면 그 연출을 보면서 여름날의 더위를 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계절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려면 보편적 표현으로 '티'를 내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은 비슷하다.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더더군다나 계절은 계층이나 세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모두에게 동일하게 대하고 우리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모든 관객의 계절적 감정은 거의 같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감독들도 이를 '영화의 분위기를 이끄는 이정표'로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괴작은 그걸 역으로 이용했다. [복수는 나의 것]은 앞서 설명한 '계절 반항심'을 전부 배제했다. 땀을 흘리면 식혀주지 않고, 위해를 가할 때도 통쾌하지 않으며, 무자비한 햇빛이 살을 태워도 나무 그늘 하나 놓아주지 않는다. 또, 류(신하균)가 누나와 함께 사는 집의 밖에는 매미소리밖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따분하고 안에는 초라한 선풍기 하나만 털털 돌아가고 있다. 류는 심지어 농아다. 소리도 못 듣고 말도 못 한다. 공장에서 잘리기까지 했다. 심지어 류의 여자 친구인 영미(배두나)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로서 얼토당토않은 조직에 발 담그고 있다. 또, 류에게 복수하려고 하는 동진(송강호)은 회사원이라는 이유로 이 더운 날 내내 어두운 정장을 입고 다닌다. 딸을 잃은 비통한 얼굴과 함께. 이 외에 나오는 캐릭터들, 장기밀매 3인방이나 형사들, 초반의 공장 사장과 시위하는 사람 등 모두가 여름의 무더위와 습도에 질린 듯 반쯤 상실한 인간성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영화 외적인 부분은 어떨까. 이 영화엔 음악이 거의 없다. 누군가를 무참히 죽여도, 극한의 복수심을 느껴도, 아주 슬픈 상황에도 배경 음악은 아주 조금만 흘러나온다. 마치 아무도 거리에 나오지 않은 잔인한 여름날처럼 매미소리, 물소리, 자동차 소리만 들린다. 또한 카메라 구도도 지극히 정적이다. 캐릭터를 좇거나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롱샷에 롱테이크가 자주 사용되고 고정된 상태에서 인물들만 뜨거운 온도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데, 이것은 멀리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어떤 무력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영화는 앞서 나열한 '계절 반항심'의 배제를 통해 어떠한 심적 통쾌함도 느끼지 못하게 한다. 복수를 성공해도, 누가 깔깔 웃어도, 차가운 물 속이라도 전혀 '시원한 여름'을 느낄 수 없다. 그저 뜨겁고 습하며 모두가 미쳐버린 여름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물론 영화가 충분히 끔찍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계절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아도 이미 답답하고 끈적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제의식, 즉 '복수의 아이러니'는 이런 계절감에 대한 역설이 뒷받침되면서 더 무거운 힘을 가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복수는 나의 것]이 아주아주 불편했다면 지금까지 한국의 여름을 제대로 느끼며 나름의 방식대로 해소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맨 처음에 말했듯 영화는 아주 잔인하다. 감정적으로도 시각적으로도. 특히 시각적인 잔인함은 한국 영화들 중 최고 수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과없이 모두 내보낸다. 그러니 주의해야 한다. 또, 영화의 내용은 심플하다.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내가 당한 복수는 나의 것이 아니다. 남의 것이지. 그래서 영화 속 주인공들은 복수를 '나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게 내용의 전부다. 그러니 누구에게 몰입할 수도 없다. 다 각자의 사정이 있으니까. 관객이 할 일이 없는 영화라는 것이다. 그래서 호불호가 다른 작품보다 더 많이 갈리는 듯하다. 누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의 예술성에 빠져들 수도 있고, 누구는 그들만의 리그에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누구는 이 작품으로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탐험할 수도 있고, 누구는 경로를 바꿀지도 모른다. 그런 기점에 위치한 영화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복수는 나의 것]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감독이 흥행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철학을 담아 만든 영화라는 점만으로도 볼 가치가 있다. 한 예술가가 뽐내고 싶은 자신의 일부분을 가감 없이 표현했고 그의 영혼을 세심하게 담았다. 영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복수는 나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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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대사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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