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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 [채우기 위해 비우기]

by jundoll 2021. 7. 7. 00:08

 

다소 헷갈리는 제목.

채우기 위해 비우기.

괜히 영어로는 Empty to Fill.

 

4학년 1학기 수업에 [비움]을 활용한 디자인 과제가 주어졌었다. 상당히 난항을 겪어서 기억에 남은 강의 중 하나인데, 디자인과 비움을 어떻게 엮어야 할지 디자인은 무엇이고 비움은 무엇인지, 비우면 비울수록 디자인은 명료해지는 법인데 [비움]의 디자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참으로 골머리를 앓던 도중에 두 인물이 생각났다. 바로 장자와 노자. 동양철학의 큰 줄기 중 하나인 도가사상의 대가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이미 그 자체로 [비움]이기 때문에 그들을 알면 자연스레 비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 생각은 은근히 들어맞았고 그때부턴 어떤 해답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논문과 서적을 있는 대로 찾아보고 부족한 나의 지식과 훌륭한 남의 지식을 이리저리 짬뽕시켜 결국 나름 괜찮게-물론 내 맘에만 괜찮게- 마무리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글을 시작한 이유는 별 볼일 없는 대학생의 과제 얘기를 하려고 한것은 절대! 아니고, 그저 그때 당시에 내 나름대로 정립해두었던 '비우기 위해 채우기', '마음 정리 방식'에 대해 스스로 짚고 넘어가면 추후에 길을 잃은 내가 마인드 컨트롤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모든 과정과 이론, 즉 방법은 매우 간단하고 볼품없다. -고작 대학생이 만든 방법이다. 그러니 따라하라는 말도 할 수 없다. 그 시간에 [그때 장자를 만났다, 강상구] 책을 읽는 게 훨씬 도움됨- 이건 그저 재미로만 보고, 혹시 정말 다른 방법이 다 소용없을 때, 혹은 주변에 이런 조언을 해 줄 사람이 없는데 책 읽을 시간이 없을 때, 혹은 나와 내 블로그, 내 글을 정말 좋아한다면 한 번쯤 시도해볼 만하다. 또한 앞으로 적어 내릴 모든 글은 도가의 노장사상에 정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도가사상은 자칫 "세속에서 모두 버리고 떠나 풀과 나무가 있는 자연에서 살아가라!"처럼 해석될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도가는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더 부각한다. 물론 억지스럽지 않게! =自然

 

내가 말하고 싶은 '방법'이라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내면적 성찰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길 원하고 더 좋은, 더 나은 삶을 살길 원한다. 자본주의 경쟁사회속에서 도태된다는 것은 기본적인 일상생활조차 (남에 비해) 너무도 쉽게 질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타인'이라는 존재가 없으면 '도태'라는 단어도 없다. 그러나 나 좋자고 전 세계 사람들을 다 죽일 순 없지 않은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절대 바꿀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는 힘들지만 '타인이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라도 멈출 수 없다. 누구나 무너진다. 그러나 다시 나아가는 사람은 분명 있고 또 훌륭하다. 가만히 멈춰있기엔 시간이 아깝고 '내'가 아깝다. 내가 앞으로 구구절절 적어 내려갈 '방법'은 다시 나아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단계적 지침(지침이라고 쓴 너무도 거만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 지침대신 '권유'라고 말하고 싶다.)이다.

 

 


프로세스는 이렇다.

 

1. 받아들이기.

2. 내려놓기.

3. 비우기.

4. 채우기.

 

 

앞서 말했듯이 정말 간단하고 볼품없다. 사실 거창할 수가 없다. 인간은 매우 간단한데 괜히 거창한 방법 들이밀어 봤자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다. 뭐 어디 먼 곳으로 떠나 한 달을 산다느니,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몇 년을 있겠다느니, 모든 관계를 부숴버리고 잠수를 탄다느니, 전 세계인의 생각을 다 통일시킨다느니 등 이런 소위 '거창한' 방법들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 계획은 할 수 있어도 막상 실현하기에는 너무 많은 현실적 상황과 부딪혀야 하기 때문이다. 먼 곳으로 떠나려면 우선 돈이 있어야 하고, 머리를 깎으면 일상으로 다시 돌아오기가 매우 힘들다. 모든 관계를 부숴버리기엔 모두가 날 버릴까 겁이 나고, 모든 이의 생각을 통일시키려면 모든 종교를 합칠 수 있는 정도의 힘이 있어야 한다. 

 

 

1. 받아들이기

 

나에게 힘든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자. 오랜 기간 준비한 시험에 낙방했다고 치자. 1년간 아득바득 이를 갈고 잘 쉬지도, 먹지도, 입지도 못한 채로 시험준비에 몰두했는데 결과는 Fail. 그럼 기분이 어떤가? 많은 생각이 들것이다. "나는 왜 이러지"부터 시작해서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야"를 거쳐 지원해주신 부모님이나 친구들, 학원 선생님이나 선배들을 볼 면목도 없고 막 포기하고 싶고 세상을 원망하게 되며 "세상 살기 진짜 X 같다"까지 가게 된다. 보통 이렇다. 너도 나도 아마 장자 할아버지를 데려와도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똑같을 것이다. 누가 이렇지 않겠는가. 열심히 준비한 시험에 떨어졌는데, 당연히 슬프지.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장자는 '인시因是'라는 개념을 써서 "그러하니까 그러한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좀 더 요즘 회사원 말투로 번역하자면 "그렇다는데 뭐.. 어쩌냐.."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말 그대로다. 일어난 일인 것이다. 이미 이 일은 나에게 일어났고 나는 결과를 받았으며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게 말로는 참 쉽다. "말로는 일어난 일인데 뭐 어쩔 거야!" 해도 속으로는 "이게 어디서부터 이렇게 됐지? 왜 이렇게 됐지?"라는 의문을 가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받아들이기'를 할 수 없으면 절대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없다. 이 말을 반대로 돌리면 "받아들이는 것이 다음 일의 시작이다"가 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인다. '받아들이기'는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어떻게 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할 수 있는게 많지 않기 때문에 비슷한 방법들을 쓴다. 대표적으로 '한 발 떨어지기'가 있다. 괜히 훈수꾼들이 장기를 더 잘 두는 것이 아니다. 훈수꾼들은 멀리서 경기의 전체를 본다. 아니, 볼 수 있다. 입시미술을 하다보면 학원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앉아서 그림을 그리지 말라고 한다. 이유는 전과 같다. 그림을 가까이서 보고 몰두해서 그리면 분명 거북이를 그리려고 했는데 완성하고 보니 자라가 있을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뻔히 의자가 있는데도 허리와 목을 꺾어가며 서서 그리는 것이다. 장기나 그림이나 하다보면 몰두하고 몰두하면 무아지경에 이르게 된다. 내가 이 수를 두면 어떤 결과가 있을지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이 획을 그으면 어떤 형태가 되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물론 훈수꾼을 선수석에 앉혀놓으면 똑같을 것이다. 그 자리에 가면 그렇게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컴퓨터가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없게 만들어 졌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한 번쯤은 의도적으로 멀리서 바라봐야 한다. 막상 시험에 떨어졌다고는 해도 다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 외에 크게 바뀐 것은 없다. 부모님의 질책이 있을수는 있지만 호적에서 파지는 않으실 것이고, 친구들이 놀릴수는 있어도 때리지는 않을 것이다. 시험에 떨어져서 다시는 시험에 응시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시험이 내년에 열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 번 더 준비하는 것 뿐. 그게 다다. 한번 받아들이려고 노력해봐라. 그리 녹록치만은 않겟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눈 딱 감고 생각을 고쳐봐라.

 

 

2. 내려놓기

 

"받아들였는데 뭐 어쩌라구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단계를 밟은 그대는 정말 엄청난 일을 한 것이다. 받아들였으면 '직시'한 것이다. 내 실력과 운, 상황과 결말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 것이다. 그렇지만 아까의 말대로 여전히 바뀐 것은 없다. 내 마음이 더 나아지기는커녕 아직도 패배의 씁쓸함은 가시지 않았고 입 안에선 복수의 피맛이 돈다. 그게 정상이다. 그러나 걷기 시작하면 뛸 수 있듯이 우리에겐 다음 단계라는 목적지가 생겼다. 게다가 이번 단계는 '받아들이기' 단계에서 겪었던 큰 패배감과 상실감은 분명 덜할 것이다. 간단한 일이다. '직시'했으니 '인정' 하기만 하면 된다. "내가 못했구나" 혹은 "내가 부족했으니까 떨어졌겠지" 혹은 "운이 진짜 안 좋았다 어쩔 수 없었구나" 등 여러 버전이 있는데, 결국 "ㅇㅈ!"이다. 

 

또다시 말은 참 쉽다. 그러나 말이 어려운것보단 낫다. 말이 쉬우니 행동도 쉬울 수 있다. 그저 결과를 받아들였으니 겸허히 내려놓는 것이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가서 시험관 죽빵을 날리면서 왜 아까 내 앞에서 신경을 거슬리게 했냐고 한들 시험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 인정이라는 단어는 무분별한 남용으로 인해 그 의미가 퇴색되어버린 대표적인 단어중 하나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인정하기 위해 수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인정한다는 것은 가슴 깊이 이해하여 동의하는 것이다. 우리는 받아들이는 일을 힘들게 한 경력이 있는 경력직이다. 당연히 인정하고 내려놓는 일은 어렵다. 그런데 다르게 한 번 생각해보면 또 이렇게 쉬운 일은 없다. 세상의 많은 것이 둘로 나눠져 있듯이 당연히 '인정'의 반대편엔 '노인정'이 있다. 그럼 '노인정' 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고 해도 앞서 말한 것들이 바뀌지 않는다. '노인정'하면 뭘 할 수 있는가? '노인정'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다음이 없다는 것이다. 단어 그대로 진짜 할 수 있는 행동이 없다. 할 수 있으면 해라! 그러나 이미 일어난 결과와 만들어진 상황이 다시 원상복구 되는 일은 절대 없다. 영화 결말을 봤는데 시간을 다시 돌린다 한들 결말을 잊지 못하듯이 이미 내 감각을 통해 세포로 넘어온 일련의 사건은 그 전과 같은 인상을 가질 수 없다. 그런 말이 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의 뇌를 갖고 싶다". 나중엔 가능할 수도 있다. 공각기동대처럼. 근데 아직 과학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편하지 않지만- 편하게 내려놓는것이다. 우리는 다음을 찾기 위해 이 과정을 밟고 있다. 다음을 원하지 않는다면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그대로 있으면 된다. 그러나 금방 질리게 될 것이다. 혼잣말에는 한계가 있고 혼자서는 절대 인생을 살 수 없다.

 

 

3. 비우기

 

이 또한 중요한 대목이다. 우리는 모든 단계가 중요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맞닥뜨린 것이다. 설렁설렁 해결할 수 있는 문제면 애초에 고민과 낙담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반을 넘어 거의 다 왔다. 우리는 앞서 나열된 두 개의 방법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여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 '인정'하여 오롯이 '나'와 '사건'만을 남겼다. 남은 행동은 간단하다. 이제 그 '사건'을 버리면 된다. 쓰레기통에 시험지를 갖다 버리라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의 분쇄기에 넣어 갈아버리고 잊으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되뇌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외부적인 해결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내면의 성찰로서 상황을 해결해야 그 다음에 외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치킨 껍데기만 먹을거면 뭐하러 치킨을 먹는가. 그냥 닭껍질 튀김을 먹지.

 

사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일이다. 잊기엔 충격적이었고 잊기엔 내가 느낀 고통은 너무나도 강했다. 어떤 것을 잊게 해주는 것은 많다. 물건, 사람, 시간, 유흥, 몰입, 등. 사용은 자유다. 그러나 '무언가'로 '어떤 것'을 잊으려고 하면 그 무언가가 다시 한번 잊어야 하는 어떤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有로 無를 만들려고 하면 당연히 또 다른 有가 생길 수도 있다. 이별의 아픔을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으로 잊으려고 한다면, 새로운 사람은 그저 내 마음에 꼭 맞고 나를 차 버리지도 않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영화 [HER]에서 주인공 '테오도르'는 심지어 AI와도 사랑싸움을 한다. 내 마음을 오롯이 다 맞춰주는 지능체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것의 도움 없이 오롯이 그 인정한 '사실'을 깔끔히 '말소'해야 한다. "어떻게 일어난 일을 없는 셈 쳐요!"라고 반문할 수 있다. 절대 없는 셈 치라는 게 아니다. 그저 마음 한편에 곰팡이를 생산하고 있는 그 쓰레기들을 집 밖으로 갖다 버리라는 것이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 계속 말하듯이 없는 셈 치는 건 현대 과학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깨끗하게 비울 순 있다. 분명히 비울 수 있다. 당연히 힘들겠지만 이미 받아들인 사실을 잊지 못할 법은 없다. 비우지 못하겠으면 비우려는 노력이라도 해라. 이 나쁜 일이 더는 나에게 영향을 끼치게 하면 안 된다. 그건 손해다 손해. 시험도 떨어졌는데 손해까지 보면 정말 많이 잃는 것이다. 그럴 필요까진 없지 않은가. 

 

혹시 비우지 못했는가? 그래도 괜찮다. 다행히 아직 한 단계가 남았다.

 

 

4. 채우기

 

대망의 마지막 챕터다. 비웠든 비우지 못했든 간에 이제는 주춤할 필요도, 시간도 없다. 이제 공터가 된 내 마음속 방에 아름다운 그림과 나한테 잘 맞는 옷을 거는 일만 남았다. "시험에 떨어졌는데 어떻게 내가 좋아하는 걸 해요!"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시험에 떨어지고 바로 시험공부가 되느냐고. 결과를 받아들이고 내려놓고 비우는 일만 해도 스스로에게 엄청난 고통과 인내를 가져다줬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시험공부에 대한 압박으로 나를 다시 채우는 일은 초인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몸 주변에 오오라가 폭발적으로 흐르지 않는 일반인이지 않은가. 일반인은 일반인답게 하면 된다. 만에 하나 초인 빙의하여 그렇게 한다고 쳐도 절대 오래갈 수 없다. 사람은 쉬기 마련이다. 카카로트도 잘 때는 이불 덮고 눈 감고 불 끄고 잔다. 비워진 공간을 그런 삭막한 것으로 채우면 쉴 때도 삭막한 것과 쉬어야 한다. 그러니 정말 내가 좋아하고 재밌는 것으로 채우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하루 이틀, 아니 일주일 정도 내가 시험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일을 하는 것이다. 마음도 잡히지 않은 상태로 일주일 더 공부해봤자 다른 사람 시험 결과나 물어보고 있지 아무 생산성도 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울지도 마라. 1,2단계에서 이미 우는 일은 끝났다. 그만큼 울었으면 이제 웃을 때도 되지 않았나. 채워라. 좋은 것들로 채우고, 재밌는 것들로 채워라. 뭔가를 할 수 있는 단계로 나를 다시 가꾸는 것이다. 출발선에 스타팅 블록(폭발적인 시작 속도를 갖기 위해 선수들이 발을 대고 있는 기구)도 없는 육상 선수가 어떻게 다른 선수들을 제치고 1등을 하겠는가. 내가 남들과 같은 상태가 아닌데 어떻게 탓을 안 할 수가 있는가. 남들과 같은 상태로 만들기 위해 채우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해야 '승산'이라는 게 생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3. 비우기]에서 다른 '어떤 것'으로 '사건'을 잊는 것은 안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 채우는 방식도 그렇게 비칠 수 있다. "결국 다른 걸로 이 사건을 잊는 거잖아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그저 인정하기만 하고 남아있는 사건을 다른 그럴싸한 일로 덮어버린 게 아니다. 우리는 사건을 비우고 -물론 비우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비우려는 노력을 했다는 것 자체가 그 전과는 분명히 다르다, 로또도 로또 용지를 사야 당첨되는 것이다- 다시 채운 것이다. 아무리 맘에 드는 옷들로 내 옷장을 가득 채웠어도 비워야만 새로 마음에 드는 옷을 넣을 수 있다. 볼일을 봐야 맛있는 밥을 다시 먹을 수 있다. 세상 이치는 참 단순하다. 해야만-이뤄지고, 비워야만-채워진다. 

 

만약 즐겁게 채웠다면, 나름 행복했던 일주일이 지났다면, 이제 그저 시간만 지났을 뿐 지난 시험을 준비하기 전과 같은 상태가 됐다. 물론 그 안에 무한한 노력이 있었지만 현실 세상의 시간은 많이 쳐줘도 10일 정도 지났을 뿐이다. 10일 만에 떨치고 일어나서 다시 준비를 할 수 있는 몸이 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막대한 이득을 본 것이다. 이득 손해 따지기 좋아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딱 맞는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진행한 이 일련의 방법은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수는 있어도 막상 결과만 보면 손해를 줄이고 이득을 보기 위해 매우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고, 그걸 멋지게 해낸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무너진다. 나보다 잘난 사람을 만나면 자존심이 무너지고 내가 준비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무너지며 내가 믿었던 사람이 나를 배신하면 무너진다. 당신이 20대라면, 혹은 30대라면 아직 무너질 일은 수도 없이 많다. 아마 평범한 계층의 평범한 사람이라면 죽기 전까지 무너지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계속 도전해야 하는 사람들은 계속 무너질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너질 일이 아무리 다양하고 억셀지라도 나만의 극복 방법만 있으면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다. 소년만화에선 주인공 한 명이 정말 다양한 적들을 단 한 가지 신념으로 이겨나간다. 나루토는 동료를 배신하지 않았고 루피는 자신의 신념을 절대 꺾지 않으며 이치고는 친구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만화는 결국 현실의 거울이다. 우리라고 못할 것이 뭐가 있는가. 

 

지금까지 쓴 글 중에 가장 길다.

내가 무너졌을 때 스스로 생각했던 방법이고 세운 결론이기 때문이다. 매우 소중하다. 남들이 만든 문화 창작물을 평가하며 쓰는 글은 어렵지 않다. 조금만 자세히 보려고 하면 백날이고 천날이고 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경험과 맞물려 아예 새로운 영향을 끼치게 될 때는 아주 특별하게 다가온다. 장자의 글이 그랬으며 [장자]를 읽고 쓴 강상구 작가의 글이 그랬으며 [노자]를 읽은 학자들의 논문이 그랬다. 이제 나는 받아들이면 내려놓을 수 있고, 내려놓으면 비울 수 있으며 비울 수 있으면 채울 수 있고 채워야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나는 나만의 극복 방법을 안 것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은 사람은 아마도 지금 현재가 힘든 사람일 것이다. 마치 민들레 씨도 교훈을 주듯이 개똥철학을 가진 대학생의 글도 당신의 인생에 아주 조그마한 디딤돌 하나 정도는 쌓았을지도 모른다. 한 번 도전해본다고 손해보지 않는다. 혹시 해결될지 누가 아는가?

 

과제할 때도 이렇게 길게 쓰지는 않았던 것 같다. 혹시라도 위 방법을 통해 해결한 사람이 있다면 마음속으로 내 손가락에게 경의를 표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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