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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탠리 큐브릭] 영화리뷰

by jundoll 2021. 8. 17. 17:41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연출하고

케어 둘리 게리 록우드 등이 연기한다.

 

시대의 대작. 희대의 괴작.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1968년에 연출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다양한 수식어는 이 영화가 가진 입지와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자신이 연출한 영화가 이토록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리는 광경을 보면 어떤 기분일까. 행복할까? 두려울까? 그것도 아니면 우매한 것들이라며 조소하고 있으려나? 어떤 마음을 가지고 만들었는지, 관객은 어떤 자세로 이 영화를 바라봐야 하는지 참으로 아리송하지만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그 '타이틀'을 무시하는 것은 서구 영화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으리라. 때는 1968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막 예비군이 창설되던 그 시기에, 북파공작원이 남한으로 마구 침투하던 그 시기에 이 '우주영화'는 개봉했다. 믿기지가 않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컴퓨터라고 하는 기계는 1980년대 중반에나 보급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컴퓨터 그래픽의 모체가 되는 어도비사의 포토샵이 처음 개발된 게 1990년이다. 그 말은 곧 모든 것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카메라와 세트, 배우로만- 존재했다는 것이다. 큐브릭 감독은 이 열악한, 아니 시대적으로 다분히 정상적인 그 시기에 30년, 40년을 앞선 -전혀 정상적이지 않은- 시청각 센세이션을 만들어냈다. 이건 어쩌면 르네상스에서부터 이어져온 그 파생된 사조들이 주를 이루던 시기에 인상주의가 툭하고 튀어나온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이후 제작된 모든 '진지한' SF영화들은 분명 큐브릭 감독이 제안한 시각적 표현에 모체를 두고 발전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지금의 우리에겐 전혀 새롭지 않다. 우리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터스텔라]를 수차례 봤고, 리들리 스콧 감독의 [마션]을 봤으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를 봤다. 이 영화들은 모두 수려한 VFX와 생생한 우주 묘사, 거기에 훌륭한 내러티브까지 있어서 아마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비교하게 되면 더없이 흥미롭게 느껴질 것이다. 큐브릭 감독이 연출한 이 괴랄한 우주영화가 가진 힘은 다른 감독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이 영화엔 긴박한 사건이나 인물들 간의 갈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최소화되어있고 비주얼과 음악의 힘이 대단히 강하다. 대사가 등장하지 않은 시간은 무려 80분이 넘어가고, 이따금씩 인간의 음성이 나온다 한들 그리 치명적이게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초반을 구성하는 인류의 원형이(원숭이) 내지르는 끽끽거리는 소리나 우주 정거장이 철컹거리는 소리, 인공지는 컴퓨터 할(Hal)에게서 나오는 지징거림 따위가 더 높게 위치되어 있다. 쉽게 말해 극단적이라는 것이다. 대사가 나오지 않을 때는 음악이 나오고, 음악도 나오지 않게 되면 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는다. 물론 우주에는 공기가 없어서 소리가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고증적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지만 영화를 이끌어가며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적인 관점으로 보기엔 다소 힘이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 극단성은 관객의 호불호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같은 양상을 띄게 한다. 누군가는 최악의 평을, 누군가는 최고의 평을 남긴다. 그리고 나에게 이 영화는 단연 최고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영화는 확실히 지루하다. 앞서 최고라고 자신있게 말해놓고 지루하다고 하면 무슨 모순이냐고 할 수 있지만 이건 사실이다. 영화적 재미는 같은 큐브릭 감독의 영화만 놓고 보더라도 저점에 있다는 것은 이견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캐릭터의 행동은 느리고 캐릭터가 나오지 않는 배경적 장면이 다수인데 심지어 그것도 느리며, 애시당초 영화의 전개 자체가 느리다. 아주 달팽이 같은 영화다. 그리고 우리가 달팽이에 대해 잘 모르듯, 이 영화가 그 긴 레이스를 끝내고 지점에 도달해도 우리는 그 진의의 행방을 찾기 힘들다. 어떤 장면은 상징들로 가득 차있고, 어떤 장면은 텅 비어있다. 또, 어떤 장면은 눈이 부시게 화려하고, 어떤 장면은 생명이 꺼진 듯 고요하다. 이야기는 절대 우리가 예측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모든 질문에 대답을 흐리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스타게이트, 스타차일드, 모노리스, 늙은 보먼, 중년의 보먼, 현재의 보먼 등 알 수 없는 의미로 가득 찬 상징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되고 폭발하는 순간 영화의 크레딧은 올라간다. 쉬운 정리와 편한 메시지 따위를 기대하고 있다면 그 마음은 당장 접는 게 좋다. 영화는 극도로 불친절하고 느리지만 건실한 공무원과 비슷하다. 이런 영화는 사람 대하듯 해야 한다. 그 사람을 대하는 나만의 방식이 필요하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주된 -정설이라고 불리는- 의견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큐브릭 감독은 그것을 그리 바라지 않았다. 애초에 노래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고, 영화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는걸 극도로 피했다고 한다. 자신의 의견에 우리를 가두기 때문일까. 그래서 우리는 이런 감독의 특이 취향(?) 덕에 어쩔 수 없이 나만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만들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시작과 끝이다. 시작의 시퀀스에서는 유인원으로 분류되는 인류의 시초가 '모노리스'라고 불리는 검은 직사각형의 외계 물체를 만진 뒤 상대를 해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본디 내 것을 지키기 위해 남에게 위해를 가한다는 개념이 없는 인류에게 처음으로 파괴와 정복의 개념을 안겨준 것이다. 동물의 뼈를 무기로 삼아 상대의 오아시스를 뺏고 상해를 가하는 그 모습에서 인류를 다시 시초로 되돌릴 수 있는 힘을 가진 핵무기 우주선의 모습으로 변하는 쇼트의 움직임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변환 장면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우연히 생겨난 어떤 '힘'에 의해 모든 갈등과 위험이 생겨나고 그것이 끝내 우리를 파괴하게 될 것이라는 애석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큐브릭 감독의 초기 작품인 [킬링]이나 [영광의 길], 후기 작품인 [시계태엽 오렌지]나 [아이즈 와이드 셧]에도 등장하는 인간에 대한 염세적인 시선으로 아마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느낄 수 있는 텍스트일 것이다. 그 비관적인 텍스트는 인간이 자신의 것, 자신의 목숨,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강한 생존 열망을 지닌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영화의 중반에 배치된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에서 한번 더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인 보먼과 인공지능인 할의 치열한 다툼은 인간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개발한 컴퓨터조차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동료에게 해를 가하고 목숨(?)이 위험해지자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존재적 한계와 과학의 무책임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어서 불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인공지능 할이 죽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보먼이 아주 끔찍한 살인을 한 나쁜 놈처럼 보이는 이유도 아마 인간이 창조한 지능체마저 인간의 한계를 가지고 있고, 그 한계를 직접 마주하며 처리하는 과정은 우리가 그다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모순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의 시퀀스는 이 모든 것을 내포하면서 결국 큐브릭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을 궁극적으로 내뱉는다.

 

 

인공지능 할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보먼은 결국 목성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영화에서의 목성은 -우리가 대게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모노리스의 근원지이고 인류에게 이기심을 선물한 선지자이며 모든 진리가 묻혀있는 곳으로 해석된다. 목성으로 빨려 들어가는-원작인 소설 속 '스타게이트'라고 표현되는- 보먼은 세상이 뒤집힌 듯한, 혹은 모든 것을 보여주는 듯한, 혹은 아무것도 아닌 듯한 영험한 빛에 이끌려 진리의 문을 넘어 한 장소에 도달하게 된다. 그 장소에서 청년 보먼은 급격한 시간의 흐름으로 중년의 보먼과 노년의 보먼이 된다. 물론 시간이 흘렀던 건지 시간을 초월했던 건지는 모른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생을 마감하기 직전의 보먼이 최후의 힘으로 손을 뻗은 곳에 아주 오래전 우리에게 폭력과 이기심을 선물했던 모노리스가 서 있고 이내 보먼은 하나의 새로운 생명으로 뒤바뀐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은 그 시간이 흐를 수 있게 만들어준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중요한 상징은 보먼의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흐른 시간 뒤에 다시 태어난, 마치 새로운 인류의 시작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하나의 태아일 것이다. 한 '명'의 태아가 아닌 '하나'의 태아인 이유는 그것이 꼭 한 개 단위의 생물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태아의 모습은 하나의 강렬한 상징으로서 작용한다. 이는 우리의 본질, 즉 인간의 기본을 이루는 어떤 요소로서 해석할 수 있다. 태아는 어떤 모습이든 될 수 있으나 그것이 태아라는 사실은 변함없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그 요소는 무엇일까. 사랑? 행복? 우울? 공포? 선? 악? 모든 게 답이 아닌 질문으로 바뀌는 그 순간 태아의 앞에 마치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라도 하는 듯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그 모노리스이다. 모노리스는 인류의 기본을 이루게 될 하나의 상징에게 강한 존재감을 어필하고 있다. 마치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난들, 얼마나 발전된 문화를 가지고 있든, 가늠할 수 없는 방대한 지식으로 유려한 과학을 자랑한들 결국 너희는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 -모노리스에게 다시 영향을 받은- 스타차일드(인류의 본질)는 마치 우리가 우주에게 원하는 답, 더 큰 개념, 더 큰 단위, 즉 '진리'인 마냥 먼 우주에서 유유히 떠다니고 있다. 멀리의 지구를 유심히 바라보던 스타차일드는 이내 우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는데 이는 마치 내가 너희라는 듯, 너희가 나라는 듯, 우리는 모두 같고 우주에 온들 달라질 건 없다는 듯, 이기심이라는 외계인이 너희를 잠식했으니 받아들이라는 듯 단호한 심정을 내보이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영화를 통해 큐브릭 감독은 지금껏 고수해온 인간의 마음에 대한 염세적인 시선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거기에 인간이 세상의 신비가 잠겨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우주로까지 무대를 옮겨 더욱 강한 어조로 굳세게 발음하고 있다. 세계관의 확장이 아닌 인간관에 대한 표현력의 확장인 것이다.

 

 

높은 평가를 내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큐브릭 감독의 영화는 -물론 아직 다 보지 않았지만- 인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 인간이 서로를 바라보며 생기는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인간이 새로운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취하는 자세를 여과 없이 표현한다. 그런 작가주의적 관점으로 영화를 바라보면 큐브릭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기술과 과학에 대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함과 동시에 인간을 이루는 기본 구성물질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물론 거기에 우주에 대한 적막한 묘사와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절망적 아리아, 생명에 대해 다루지만 생명의 냄새가 나지 않는 차가운 색채까지 더해져 가히 우주대명작이라고 칭할 만한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자신이 가진 철학을 이토록 혁신적인 표현과 함께 나타낼 수 있는 감독은 그리 많지 않다. -거의 50년이 넘어가는- 시대적 감안을 하지 않더라도 이만한 작품은 나오기 쉽지 않다. 시대를 앞서 생각하는 부분만 봐도 지금 이런 작품을 만들려면 2060년대를 예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대부분의 묘사를 정확하게 맞췄다. 태블릿 pc나 우주음식, 중력에 관한 내용 등 소름 끼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은 아무리 전문가의 조언을 받았다고 해도 절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미래를 예측하고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으며 50년이 지난 시간이 지나도 회자되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 감독의 영민함과 무구한 노력, 창작의 의지에 뜨거운 울림을 느꼈다.

 

묵히고 묵혔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드디어 꺼내 음미했다. 대중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대중의 선택은 결국 시대의 선택이다. 큐브릭 감독은 대중과 감독, 작가와 작품들이 선택했다. 그만큼 위인이고 귀인이며 또한 기인이다. 이제 몇 편 안 남았다. 큐브릭을 마스터하는 그날까지 정진이다.

 

 

 

[2001 Space Odyssey]

서사 ★★★★★
연출 ★★★★★
대사 ★★★★
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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