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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박하사탕, 이창동] 영화리뷰

by jundoll 2021. 8. 19. 14:03

 

 

이창동 감독이 연출하고

설경구, 문소리 등이 연기한다.

 

내가 다섯살 일 때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두 번째 영화 [박하사탕]은 장준환 감독의 [1987],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 이어 내 기준 최고의 한국영화 반열에 올랐다. 물론 만점을 준 다른 한국영화들도 많지만 이 세 편의 영화가 최고의 '한국영화'인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민족적 알레고리가 내 마음에 깊이 닿았기 때문이다. [마더]는 한국의 뒤틀린 어머니상을, [1987]은 민주화 운동 당시의 여러 인물상을, 그리고 [박하사탕]은 격동하는 시대가 낳은 비극적인 남성상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세 편의 영화가 나에게 최고의 한국영화인 이유는 영화의 전달적인 요소-한국인이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의미와 표상-와 영화의 예술적인 요소-심장을 울리는 복합예술의 시청각적 작품성-를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박하사탕]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로서가 아닌 윤도현의 노래 [박하사탕]과 인터넷에 떠도는 여러 밈들로서 먼저 접했다. 특히 스탠리 큐브릭의 공포영화 [샤이닝]의 "Here's Jonny!!"을 외치는 잭 니콜슨의 '그 씬'처럼 정말 많은 곳에 사용되는 그 유명한 설경구 배우의 철로 절규 씬, "나 다시 돌아갈래!!" 씬은 아마 모르는 사람이 더 적을 것이다. 항상 인터넷과 함께 살아온 나도 설경구가 절실히 외치는 그 씬을 보며 대체 저 사람은 왜 저기서 저러고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뭔가 손이 가지 않았던 이 [박하사탕]. 이제는 내 마음을 후벼 파 자신의 입지를 다진 훌륭한 하나의 작품으로 자리매김하여 평생 기억될 것이다.

 

영화 [박하사탕]은 비극적인 한국의 현대사 속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한 인물의 서사를 그리고 있다. 그는 꽃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순박한 청년이었고, 아리따운 소녀를 사랑하는 소년이었으며 주변과 어울릴 줄 아는 건실한 친구였다. 그러나 세상은 안과 밖 모두 크게 요동치고 있었고 그저 한 명의 시민이었던 영호도 격동하는 변화에 힘겹게 발을 맞춰야 했다. 군에 입대해 어리바리한 이등병 시절에 일어난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하나의 사고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으며 전역 후 이어갔던 형사활동은 그의 광기를 부추기기만 했다. 소위 빨갱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협박하며 정의나 사랑 따위의 시시콜콜한 감정은 없애고 살아가던 형사 영호는 시간이 첫 아이도 갖게 된 어엿한, 그러나 살짝은 뒤틀린 가장이 되어 있었다. 시간은 흘러 가구 사업을 하던 영호는 동업자에게 금전적 배신을 당하게 되고 이혼은 물론이거니와 수중에 가진 돈도 한 푼 없는 신세로 전락한다. 비참한 인생을 더는 견딜 수 없었던 영호는 끝내 자살을 결심하게 되고 가지고 있는 돈을 탈탈 털어 권총 한 자루를 사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것도 실패하게 된다. 첫사랑 순임 씨의 남편이 그를 찾아와 순임 씨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게 해 주고 정신이 피폐해진 그는 라디오에서 언젠가 흘려 들었던 대학교 친구들의 야유회에 찾아가 깽판을 부리며 위험천만한 기찻길에 오른다. 그리고는 -한국 영화 희대의 명대사-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며 쓸쓸하고 처량한 죽음을 맞이한다. 언젠가부터 뒤틀렸는지 모를 그의 선택은 실수로 바뀌고 그 실수의 총합은 그를 나락으로 끌어당기며 결국 파멸을 가져왔다. 이는 좋게 포장하면 시대의 비극이고 나쁘게 비난하면 개인의 책임이다. 분명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순간은 있었다. 형사 말고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었으며 첫사랑을 따라 갈 수도 있었다. 아내와 아이에게 충실할 수 있었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지 않았다. 엄청난 트라우마로 인해 못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하지 않은 것이다. 상황의 비극과 개인의 실수가 합쳐져 그토록 잔인한 삶을 산 영호는 이제 죽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하나 짚고 넘어갈 점은 이 영화의 연출법이다. 영화 [박하사탕]은 일전에 리뷰한 가스파 노에 감독의 프랑스 극단주의 영화 [돌이킬 수 없는]처럼 거꾸로 진행되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결론부터 보여주고 시작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하사탕]의 그 방식은 [돌이킬 수 없는]의 그것처럼 서사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당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시작부터 정신이 불안해 보이는 설경구의 모습과 기차에 일부러 몸을 내던져 치이기 직전 내뱉은 -유명한- 절규는 굳이 의미를 해석할 필요도 없이 직설적이기에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 또한 단락을 구분짓듯 중간중간 시간을 뒤로 돌리는 연출을 직접적이게 보여주는데, 이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사용한다. 뒤로 걷는 사람, 뒤로 가는 차, 다시 나뭇가지에 붙는 떨어지는 나뭇잎 등을 기차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아마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며 기차에 치였던 영호(설경구)가 기차라는 -자신만의- 매개체를 통해 과거를 회상한다는걸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영화 내내 기차라는 상징은 끊이지 않고 등장한다. 아예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가 감독의 전작 [초록물고기]와 동일하게 기차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영화의 중간중간에도 버려진 폐기차, 열심히 달리는 기차, 기차 속 인물, 멀리서 힘차게 달리는 기차, 나를 향해 다가오는 기차 등 여러 모습의 그 기다란 이동수단은 꾸준하게 보인다. 이창동 감독이 기차에 큰 의미를 두고 있으리라 짐작한 나는 영화 내내 등장하는 기차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부에는 영호에게 기차가 의미하는 바를 -영호는 어리버리한 이등병 당시 기찻길 위에서 선량한 한 명의 소녀를 총으로 쏘게 된다. 물론 실수였지만 이는 엄청난 트라우마로 자리 잡게 된다- 정확히 짚어준다. 결국 기차는 영호의 모든 것이었다. 첫사랑 순임(문소리)을 떠나보냈던 후회였고, 이름 모를 소녀를 죽인 장소였으며, 자신을 과거로 돌려 보내줄 수단이자 죄 많은 삶을 청산해줄 단두대인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마치 불가능한 일, 그러니까 후진 없이 계속 앞으로만 나아가는 기차의 방향에 반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이는 불가능의 역설성을 통해 비극적 시대의 산물인 영호에게 보내는 하나의 작은 위로이고 지나온 날의 후회 속에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달콤 쌉싸름한 말일 것이다. 영화는 기차라는 상징을 통해 영호의 심리적인 요인을 설명함과 동시에 외부적인 사건을 짚어주고 있고, 또한 기차의 속성을 통해 영화 밖의 우리에게도 일련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누구나 시간은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비극적인 삶을 산 영호도, 첫사랑을 잊지 못한 순임도 아무도 되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한다. 그때가 좋았지.. 그때가 아름다웠지.. 그때로 돌아간다면.. 등. 그러나 우리가 너무도 잘 알다시피 열차는 잠깐 멈춰 사람을 태우고 내리게 할지언정 뒤로 돌아가는 일은 절대 없다. 열차를 힘으로 뒤로 돌릴 수 없는 우리도 당연히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잘못된 경로로 가고 있다면 잠깐 멈춰 경로를 수정하는 일 정도는 가능하다. 반대편으로 가서 다시 몇 정거장 뒤로 돌아갈 수 있고. 잠깐 내려 화장실에 들릴 수도 있으며 다른 열차로 갈아탈 수도 있다. 영호와 순임은 그러지 않았다. 잠깐 내려 화장실은 갔을지언정 다른 열차가 아닌 계속 타고 가고 있던 그 열차에 다시 몸을 던졌다. 생각할 겨를이 없던 시기임은 맞다. 그러나 시대는 후회를 받아주는 물렁한 놈이 아니다. 다행히 영화의 마지막에는 영호가 어떤 힘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과거로 돌아왔다는 연출을 보여준다. 그의 비극적인 삶이 마치 꿈이었다는 듯 안도의 미소를 짓고 앞으로의 삶의 방향에 대한 결심의 눈물을 흘리며 끝이 난다. 당연히 영화니까 가능한 일이다. 물론 새로운 삶의 시작이 아닌 주마등의 시각화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본 이창동 감독은 언제나 '다음'을 그린다. '다음'을 그린다는 것은 '희망'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감독은 이런 허구적 상상-과거로 다시 돌아와 2회차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영호-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삶은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어차피 살아가야 하는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뒤늦은 후회가 아니라 계속적 선택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창동 감독이 시퀀스를 다루는 방법도 가히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딥 포커스, 롱 테이크 등을 이용한 미장센 기법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딥 포커스라 함은 장면의 전경, 중경, 후경을 모두 비추며 한 번에 많은 장면을 보여주면서 현실성을 높이는 촬영 기법이고, 롱 테이크라 함은 한 쇼트를 길게 늘여 인물의 이동이나 배경의 변화를 연속적으로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기법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극적인 영화적 연출 잦지 않다. 카메라가 과히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을 이 앞에 도착할 때까지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사실처럼. 거기에 정적에 가까운 효과음과 인위적이지 않은 배경음은 그 자연성을 극대화하고, 이 같은 요소들이 뭉쳐 이창동 감독의 리얼리즘을 완성하여 시대에 의해 피폐해진 한 인물의 생애를 표현하는 데에 최적으로 부합했다. 또, 카메라는 자주 다수의 인물을 잡아낸다. 오직 한 명만 잡아내어 그 인물에 모든 집중력을 쏟아붓는 게 아니라 적어도 두 명, 많으면 네 명 정도까지의 인물을 화면에 담고 서로가 상호작용하는 장면이 자주 사용된다. 이것은 분명 기법적으로 보면 앞의 카메라 기법과 동일하게 사실감을 높이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고, 의미적으로 보면 여러 사람의 상호작용 속에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성질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시선으로 봐도 훌륭한 영화다. 기법이면 기법, 메시지면 메시지, 연기면 연기, 서사면 서사. 입을 계속 벌리고 보느라 침이 바싹 마르는 경험을 했다. 그만큼 쓰라리고 그만큼 아련하며 그만큼 비극적이다. 시대적 감안이라는게 전혀 필요 없는 영화다. 아무리 시간이 흐른들 고전은 고전이고 명작은 명작이다. 설경구의 그 포효하는 밈은 정말 영화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니 밈에 사로잡혀 영화를 속단하지 말라. 이 영화는 정말 걸작이다.

 

 

 

[박하사탕]

서사 ★★★★★
연출 ★★★★★
대사 ★★★★
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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