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 [대학살의 신, 로만 폴란스키] 영화리뷰

by jundoll 2021. 8. 16. 23:30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연출하고

조디 포스터, 케이트 윈슬렛, 크리스토프 발츠, 존 C. 라일리가 연기한다.

 

본디 작가와 작품은 떼어놓을 수 없다. 그래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를 보는 것이 꺼려진다. 당연히 영화는 감독 혼자 만드는 게 아니다. 기술자가 있고, 각본가가 있으며, 배우가 있고, 배급사가 있고, 제작사가 있으며 결정적으로 관객이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NG를 외칠지 CUT을 외칠지는 감독에게 있다. 이것은 미라맥스의 하비, 밥 와인스틴이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 한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즐기는 것에 그렇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영화 총책임자(감독)는 다른 스태프나 중역들과는 당연히 위치부터 다르다. 그러니 꺼려지는 것이다. 아무리 어둡고 괴로운 삶을 살았대도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듯 작품의 완성도와 작가의 인간성이 부딪힐 때 우리는 괴리감에 사로잡힌다. 차라리 영화가 작품성이 떨어졌으면 속 시원히 안 보고 말았을 것이다. 아주 힘들다. 칭찬하기도 좀 그렇고 하염없이 깎아내리기도 좀 그렇다. 또, 영화사에 길이 남을 굵직한 작품들이라 보지 않을 수도 없다. 나는 언제나 그에 대한 존경심과 연민, 혐오감과 멸시를 두 손에 든 채 그의 작품을 감상해야 한다. 어떤 감독보다 어렵다.

 

영화 [대학살의 신]은 한국어 번역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중 하나다. 차라리 원제 그대로 [CARNAGE]를 쓰는 건 어땠을까. '대학살의 신'이라고 하면 영화의 내용을 전혀 예상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당연지사고 위의 포스터에 배치된 네 명의 인물 중 한 명이 '대학살의 신'이 되어 마을 전체를 학살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뭐 나만 그렇겠지만. 물론 영화에 '대학살의 신'에 대한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기는 하다. 이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폭력성을 일컫는 용어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 위의 네 캐릭터는 모두 '대학살의 신'이 발동되어 서로를 죽일 듯 잡아먹으려고 한다. 자식들의 사소한 다툼으로 인해 만난 두 부부, 네 사람은 교양과 의식이 넘치고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소위 '어른'들이다. 아이들의 싸움을 원만하게 해결하려고 하고 피해자의 부모는 관대하게, 가해자의 부모는 겸손하게 서로를 마주한다. 그러나 어디 대학살의 신이 가만히 있는가. 그렇게 의식 수준이 높아 '보였던' 네 명의 '어른들'은 단어 하나, 표정 한 번에 갑작스레 갈라지게 된다. 서로의 입장이 점점 부딪히고 숨겨뒀던 칼을 꺼내며 상대를 깎아내리고 치부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이다. 여기서 더 재밌는 것은 부부대 부부였던 2대 2의 갈등의 양상이 남자대 여자인 2대 2로 바뀌고, 곧 서로의 편도 적도 아닌 1대 1대 1대 1의 아수라장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인간의 집단적 단위가 세분화되는 것과 같아서 서로가 배려했던 초반과 달리 결국 부부간의 싸움으로 번지게 되고 얼마 가지 않아 더 근본적인 단위인 남자와 여자의 입장 갈등이 되었으며 또 얼마 가지 않아 자기 자신만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남과 다르고 이기적인 생물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주는 그 밑바닥의 인간상은 아주 더럽고 치사해서 보는 이에게 어떤 은은한 불편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아주 불편한 영화다. 마치 이재규 감독의 [완벽한 타인]처럼 말이다. 

 

 

[완벽한 타인]과 비슷한 점은 또 하나 있는데, 영화가 내내 갇힌 공간, 즉 페넬로피(조디 포스터)와 마이클(존 C. 라일리)의 집에서만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 조그만 공간에서 일어나는 네 명의 치열한 공방전은 자칫 지루하거나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공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오가는 인물들의 감정에 더 집중할 수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집중을 높여주는 것은 단연코 네 명의 배우가 가진 힘일 것이 분명하다. 장담할 수 있다. 네 명의 배우는 정말 연기의 극한을 보여준다. 크리스토프 발츠의 뻔뻔한 워드플레이, 조디 포스터의 히스테릭한 표정연기, 존 C. 라일리의 무뢰배적인 행동, 케이트 윈슬렛의 우스꽝스러운 행동 연기 등 각자가 가진 장점을 극대화시켜 캐릭터에 완벽히 녹아든 모습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네 배우 다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지금껏 못 친 헤엄을 마음껏 치며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배우들의 연기력을 입증할 수 있는 -물론 이미 입증된 사람들이지만- 최적의 무대에 올려두니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탁월하다.

 

영화는 지금까지의 갈등이 전혀 불필요했다는듯 화해한 두 아이의 모습과 새로운 자연을 만끽하는 햄스터의 모습으로 끝난다. 이는 아주 직설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이는 곧 '어른'이라 함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예의를 차리고 위선을 떨으며 자신의 하찮은 위상을 지키기 위해 상대를 깎아내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 '괴물'들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비록 앞니가 두 개 뽑힐 만큼 싸우고 상대방을 고자질쟁이라고 놀려도 금세 다시 호호깔깔 웃기 나름이다. 아이들에겐 자존심을 지키면서 싸우는 것보다 그냥 화해하고 노는 게 더 재밌기 때문이다. 당장의 재미를 공유할 친구가 더 절실한 그들은 챙겨봤자 아무 짝에 쓸모없는 위상을 버릴 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게 쉽지 않다. 직업의, 철학의, 관계의 차등과 위계로 점철된 그들은 자신의 주장이나 위치가 부정당하면 마치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사람처럼 발작하기 마련이다. 그게 사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말이다. 그만큼 오래 살았고 그만큼 많은 생각을 해서 그만큼 '나'를 규정해 왔는데, 남이 부정하는 꼴을 어떻게 보겠는가. 그게 전부인 것이다. 아무리 남을 위하고 세상을 걱정하는 척 해도 결국 내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나' 뿐인 것이다. 아마 어른들은 자존심(여기서는 '나'라고 해석해도 될 듯하다)을 내려놓기 더 힘들어진 아이들인게 아닐까.

 

영화는 짧고 굵다. 그러나 작가와 작품을 떼어놓을 수 없기에 길고 굵다 못해 터질 듯한 영화가 될 것이다. 작품의 완성도와 작가의 인간성. 나는 아직 답을 잘 모르겠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CARNAGE]

서사 ★★★★
연출 ★★★★
대사 ★★★★
연기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