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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펀치-드렁크 러브, 폴 토마스 앤더슨] 영화리뷰

by jundoll 2021. 10. 15. 18:20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연출하고

아담 샌들러, 에밀리 왓슨이 연기한다.

 

이 영화는 짧지만 강하다. PTA 영화니까 당연히 러닝타임이 길 것이라 예상하겠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고작 1시간 35분이다. [매그놀리아], [부기 나이트], [마스터], [데어 윌 비 블러드] 등의 러닝타임이 2시간 30분에서 3시간 사이였음을 고려하면 이토록 짧다는 것이 오히려 생경하게 다가온다. 짧지만 강렬한, 그렇다고 절대 쉬이 넘어가려 하지 않는, 아담 샌들러의 새로운 면을 보여준 [펀치-드렁크 러브]는 시간으로 보자면 아주 소박한 그러나 어쩌면 그의 영화 중에서 가장 거대한 '사랑 이야기'다.

 

주인공인 베리(아담 샌들러)는 누나가 7명이다. 나에게는 형이 한 명 있는데 (지금은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지만) 어릴적엔 아주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지라 꽤 고통을 받았었다. '형제'라는 관계는 '부모님'과의 관계와는 다르다. 내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부모는 평생 자식에게 '을'의 입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형제는 나와 같은 '갑'의 입장을 가진 경쟁자이자 동료다. 그러니 피붙이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든든한 내 편이 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원망하는 사람이자 평생의 적이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가진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어린 시절에 일어난 별 거 아닌 사건으로 그 피아관계는 정립된다. 예를 들어 7명의 누나와 여동생에게 gay boy 라며 쉼 없이 놀림을 당하던 베리가 강아지 집을 지어주던 망치를 휘둘러 '머리가 이상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남동생'으로 각인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베리는 자신을 쉼 없이 괴롭히는 누나들과 여동생에게 몇십 년을 그렇게 휘둘려 살았으니 우울증, 대인기피증, 온갖 피해망상, 허언증, 자격지심, 분노조절장애, 환청, 조현병을 고루 갖춘 이 시대의 단 하나뿐인 정신병 집합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여자를 만나는 것도, 정상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것도, 누나의 생일을 아무렇지 않게 챙겨주는 것도 베리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일이었다. 베리에게 정신이 얼얼한 정도(punch-drunk)로 푹 빠진(love) 레나(에밀리 왓슨)이 등장하기 전까진 말이다. 

 

 

처음엔 베리도 그녀를 거부했다. 누나들에게 또다시 약점을 잡히기도 싫었고, 여동생에게 온갖 질문과 구박을 받는 것도 질렸으며, 애초에 레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무한정으로 대시하는 레나를 앞에 두고도 여전히 거짓말을 쳤고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몇십 년 받은 고통으로 형성된 성격이 어떻게 쉽게 고쳐지겠는가. 거기에 베리는 처절히 외로웠던 지난밤, 내 말을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해 폰섹스를 했고, 하룻밤을 목소리만으로 즐겼던 상대에게 금전적인 협박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까 도무지 정상일 수 없는 이 무아지경의 상황에 나타난 레나라는 인물은 어쩌면 베리를 더욱 파멸로 몰아갈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베리는 편집증이 있어서 모든 행동에 이유가 명확해야만 안심을 하는데, 그녀가 베리에게 빠진 명확한 이유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같은 난해함과 애석함 속에서도 이 커플은 구원받는다. 뻔하게도 제목에도 나온 '펀치-드렁크 러브'로 인해서 말이다. 영어 숙어인 punch-drunk는 앞서 언급했듯 '정신이 얼얼한' 정도로 해석한다. 이는 권투 선수들이 경기 도중 주먹에 맞으면 머리에 충격이 가해져 마치 술에 취한 듯 멍해지는 느낌을 직설적인 단어의 조합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인물의 사랑도 마치 서로에게 사랑의(?) 펀치를 날리는 듯 정신이 얼얼할 정도로 멍한 상태까지 공방을 주고받는 게 느껴진다. 이렇듯 영화의 메시지는 명료하다. 사랑, 결국 사랑이다. 평생을 시달려온 온갖 정신병을 극복하게 해 준 것도 사랑이었고, 못된 범죄자들에게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쥐어준 것도 사랑이었으며, 끝내 서로가 하나의 정상적인 개체가 되게 해 준 것도 사랑이었다. 중학교 때 꼭 배우는 시가 하나 있다. 김춘수 시인의 <꽃>. 정말 너무도 유명한 구절이라 굳이 세세하게 적지 않아도 모두가 알지만 이 영화에 꼭 들어맞는 구절이라고 생각해 인용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中

 

 

베리도 레나가 나타나기 전엔 그저 하나의 몸짓이었다.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몸짓, 현재의 강박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몸짓, 미래의 막연한 걱정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몸짓. 자신을 위해 살지만 자신을 위한 행동은 그 어디에도 없었던 베리의 삶은 누군가가 베리의 존재를 애써 불러주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누나, 직원, 동생, 점원, 관계자, 폰섹스상대 등 남의 눈치만을 보고 살던 베리는 자신을 불러준 사람(레나)을 위해 꽃이 되려고 노력했다. 레나를 다치게 한 못된 일당에게 불같이 터지는 화와 폭력성을퍼부었고, 일당의 보스인 폰섹스 업체 사장(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에게 모든 감정을 명확하게 전달했다. 누군가에겐 별 거 아니었을 이런 행동은 베리에게 인생을 뒤바꿀 수 있는 마지막 찬스이자 꽃이 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누구나 마음 어딘가엔 사랑이 있다. 그리고 그것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는 열어보려고 도전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레나는 베리의 마음을 열어보려고 다가갔고, 베리는 누구에게도 줄 수 없어 고이 간직해둔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사랑'이라는 건 참 이상하다. 정의 내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각자가 느끼는 사랑이 다르고 각자가 가진 사랑이 다르다. 상대에 따라서도 사랑은 달라지고 사랑에 따라서 상대가 달라지기도 한다. 아마 전 세계 사람을 대상으로 "사랑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라는 설문조사를 하면 전 세계 인구수만큼의 답이 나올 것이다. 어디선가 '꿈'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는 유명한 과학자의 언급을 봤다. 내가 보기엔 사랑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어떤 감정을 사랑한다고 규정할 수 있을까. 상대적으로 쉬워 보이는 '기쁨'이나 '슬픔' 같은 감정도 단 하나의 기준을 제시할 수 없는데 '사랑'은 오죽할까. 뭐 어차피 중요한 것은 모두가 가진 감정의 비밀을 밝혀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리 본인이 개차반(?)인 상태여도 분명 내 마음속엔 나만의 사랑이 있고, 개차반(?)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어도 마음속엔 그 사람만의 사랑이 있다는 것, 그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사는 삶이 조금은 더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당연히 나만의 무논리 개똥철학이겠지만.. 뭐 어차피 사랑이라는 감정도 무논리 개똥철학으로 점철되어 있으니 쌤쌤 아니겠는가. 

 

 

사랑의 영화다. 그러나 그 모습을 표현함에 있어 PTA 감독의 편집과 음악은 기존의 로맨틱코미디 장르와는 다른 양상을 가진다. 베리의 정신상태를 표현하는 숨이 막힐듯한 음악과 두 사람의 사랑을 표현하는 서정적인 선율은 강한 대비를 이루며 청각적 체험을 극대화시킨다. 거기에 인물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 직설적인 가사로 무장한 OST는 영화의 몰입도를 높여주어 9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런데 하나 주의해야 할 점은 PTA 유니버스(?)에 어느 정도 면역이 있어야 더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라는 것이다. 처음 영화 선배인 친구가 PTA 감독을 추천해줬을 때 입문 영화로 [매그놀리아]를 추천해줬고, 만약 이 영화를 재밌게 봤다면 모든 PTA 영화가 재밌을 거라고 했었는데 그 말이 이제 이해가 간다. PTA 입문작으로 이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를 보면 알쏭달쏭 애매모호하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뭔가 진전은 없고 자꾸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음악만 나오면서 끝도 없이 암울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부끄럽지만 PTA 영화를 과반수 이상 본 입장에서) 이 영화는 입문작으로 추천하지는 않는다. 짧지만 그렇기에 설명이 부족하고,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에 재미가 반감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러나 PTA는 그리 친절하지 않다. 나는 [마스터]를 제대로 느끼지 못해서 한 번 더 봐야 한다. 그래서 몇 개의 영화를 보며 PTA의 스타일을 익힌 뒤 [펀치-드렁크 러브]를 보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어떤 감정을 캐치하기 더 쉬울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니 참고만 하길 바라며.

 

짧고 유쾌한, 그러나 쉽지는 않은 PTA의 정수를 한 편 본 기분이다. 뻔하지 않은 로맨틱 코미디, 그리고 깊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쥐어줄 영화를 보고 싶은 -그리고 긴 영화는 싫어하는- 사람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Punch-Drunk Love]

서사 ★★★★☆
연출 ★★★★
대사 ★★★★
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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