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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킬링, 스탠리 큐브릭] 영화리뷰

by jundoll 2021. 8. 13. 02:04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연출하고

스테링 하이든, 엘리사 쿡 주니어 등이 연기한다.

 

[킬링]은 1956년에 개봉한 스탠리 큐브릭의 세 번째 장편 영화다. 당연하게도 흑백영화이고, 완벽한 계획으로 경마장을 터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어제는 큐브릭 감독의 1957년작 [영광의 길]을 봤는데, 1년 만에 묘하게 달라진 느낌이 있다. [영광의 길]은 조금 더 추상적이고 작가주의적이었다면 [킬링]은 다소 직설적이어서 이해하기 쉽다고나 할까. 조금 더 오락영화의 느낌이 강하다고나 할까. 더 설명적이라고나 할까. 무튼 둘 다 아주아주 (오래된) 좋은 영화임은 분명하다. 앞서 말했듯 당연하게도 흑백영화이니 그 특유의 부족한 느낌이나 튀는 음향, 어색한 편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굳이 보지 않아도 될 영화인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현 21세기 영화시장에서 '대가'라고 불리는 감독들의 원형을 찾고 싶다면 반드시 봐야 한다.

 

[킬링]은 마치 [시계태엽 오렌지]처럼 영화 밖에 존재하는 설명자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당시에는 관객들이 이런 류의 영화, 즉 다수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개별적으로 보여주며 하나로 합치는 군상극의 형태를 가진 영화에 분명 익숙지 않았을 터이니 합당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내레이션의 강점은 몰입이다. 누군가가 상황에 대한 설명을 일목요연하게 들려주기 때문에 관객들은 아무리 복잡한 내용을 가지고 있어도 그리 복잡하게 느끼지 않는다. 그런 점으로 보면 영화 곳곳에서 적절한 타이밍에 나오는 빠르고 정확한 내레이션은 합당한 처사를 넘어 영리한 연출로 받아들여지고 이는 데이빗 핀쳐 감독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교통사고 시퀀스에서도 비슷하게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스킬적인 부분 외의 비주얼적인 부분에서도 많은 영화가 떠오른다. 경마장 내부 돈을 모아둔 곳에 들어가기 전 광대 마스크를 쓰고 샷건과 더블백을 매고 차분히 걸어가는 모습의 연출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 속 조커의 모습이 강하게 투영되고, 서로의 정보를 잘 모르는 범죄자들이 한데 모여 작전 회의를 하고 끝내 누군가는 실수하고 누군가는 배신하게 되는 그런 모습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많은 영화, [저수지의 개들]이나 [재키 브라운]의 향기가 스쳐 지나간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연출적 강점은 '낭비되지 않는 쇼트'다. 이 영화에 낭비되는 쇼트는 없다. 모든 쇼트가 치밀하게 짜여져있는데, 이는 인물들의 세세한 행동을 모두 보여주며 한 명이라도 '그냥'은 없도록 만들어내고 있다. 그 덕에 우리는 인물들 간에 생성되는 서스펜스도 전부 이해할 수 있고, 아무리 장면들이 빠르게 지나가도 영화의 줄기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엑기스만 남겨 놨다. 물론 요즘엔 이런 영화가 많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나 쿠엔틴 타란티노, 데이빗 핀쳐 같은 감독들은 절대 영화를 질질 끌지 않는다. 필요한 장면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필요 없는 장면은 절대 보여주지 않는 쿨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2021년이다. 60년 넘게 지난 지금은 이게 당연할지 몰라도 1956년에는 아니었다. 게다가 영화 [킬링]은 러닝타임도 길지 않은 데다 씬들의 조임이 전혀 풀어지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획기적인 방식들 때문에 아마 당시에는 아주 획기적인 영화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의 중기-후기작들처럼 강한 메시지가 있는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범죄자가 계획하고 성공한다' 같이 일차원적인 흐름을 가진 영화도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아주 완벽하고 멋진 계획을 세웠어도 아주 사소한 것들에 의해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망가진 자물쇠 하나, 작은 강아지 한 마리에 지금껏 이행했던 모든 계획이, 훔친 돈들이 거센 바람에 맥없이 날아가는 허무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계획을 세웠던 것은 영화의 주인공 쟈니(스테링 하이든) 뿐이 아니었다. 누구는 남편의 돈을 정부에게 갖다 바치려고 했고, 누구는 자신의 아내를 겁탈(했다고 믿는)한 쟈니에게 복수하려고 한다. 영화의 말미엔 당연히 모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다. 돈은 멀리멀리 날아갔고 쟈니는 검거됐으며, 다른 이는 모두 죽었다.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별 의미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큐브릭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시대적으로 보자면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이 이례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 있을 때였다. 물론 이는 얼마 가지 않아 1960년대 초부터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더니 1965년 월남전과 심해져가는 냉전과 여러 사회문제로 피폐해졌지만 말이다. 감히 짐작해보건대 큐브릭 감독은 너무나도 완벽한 계획으로 모든 게 잘 풀리던 그때의 미국의 상태에, 국가간의 관계에 대해 경계심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완벽한 계획이라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고 사소한 일 하나에 언제든 다시 무너질 수 있으니 자만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쟈니가 모든 돈을 잃고 경찰에게 잡히기 직전 나지막이 내뱉는 마지막 대사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요즘 스탠리 큐브릭 도장깨기를 하고 있다. 확실히 초기작들은 애초에 흑백이기도 하지만 아주 약간 어수룩한 면이 보인다. 총을 맞았는데 총상이 안 보인다거나 분명 죽은 시체는 6 구인데 총성은 4번밖에 없었다거나 총을 맞았는데 피는 안난다거나.. 아마 시대의 산물일 수도 있고 제작사의 간섭일 수도 있다. 뭐 어차피 그런 것들은 그리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그저 좋아하는 감독의 오래전 영화를 지금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이다.

 

 

 

[The Killing]

서사 ★★★★
연출 ★★★★★
대사 ★★★
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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