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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라스트 듀얼, 리들리 스콧] 영화리뷰

by jundoll 2021. 10. 22. 02:33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하고

맷 데이먼, 아담 드라이버, 조디 코머, 벤 에플렉 등이 연기한다.

스포일러 조심.

 

영화 [라스트 듀얼]은 하필 [듄]과 같은 날에 개봉해 감독의 명성에 비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어 아쉽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4년 만에 돌아왔다. 이렇게 긴 공백기를 가지는 감독이 아닌데, 예기치 못한 전염병 상황은 그의 근면성실함마저 앗아가버렸다. 덕분에 곧 공개될 [하우스 오브 구찌]를 포함하면 같은 해에 같은 감독의 영화를 두 편이나 볼 수 있으니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닐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라스트 듀얼]은 좋은 영화다. 감독의 장기를 모두 보여줬고, 첨예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배우들의 연기는 절제미가 있다.

 

 

영화의 배경은 중세 말기다. 게다가 겨울이라 눈이 내리고 모닥불이 피어오른다. 또, 철제 갑옷을 입은 전사들의 결투를 다룬다. 스콧 감독이 어떻게 구현해냈을지 벌써부터 설레이지 않는가. [글레디에이터]와 [마션]에서 보여줬던 미친듯한 현장감을 이 영화에서도 느낄 수 있다. 또, 완벽한 배경과 미술에 어우러진 여러 소리들, 창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 관중의 함성소리,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 말이 다그닥 거리며 뛰는 소리들은 우리를 가뿐하게 14세기의 프랑스로 옮겨놓는다. 그러니까 나같은 중세 덕후들한테는 더 없이 좋은 영화다. [왕좌의 게임], [라스트 킹덤], [바이킹스]의 모든 시리즈를 본 나로선 위의 포스터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물론 감독의 재현력과 스케일 외에 캐스팅만으로도 이미 볼 가치가 넘쳐나는 영화다. 수준급의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이고, 그들은 배역에 훌륭히 녹아들었다. 상당히 현대적인 외모를 갖춘 배우들인데도 불구하고 14세기 중세 말기의 인물을 연기하는데엔 무리가 없었다. 특히 마르그리트를 연기한 조디 코머는 이전에 [킬링 이브], [프리 가이]에서 보여줬던 도시적이고 미래적인 마스크 말고도 새로운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또, 남자 배우 세명의 마스크는 모두 신기하게도 선과 악이 공존하여 각자의 잘잘못을 따지는 영화의 맥락에 부합한다. 완벽한 현장감, 수준 높은 재현력, 배우의 호연 말고도 칭찬할게 더 남았다면 믿겠는가?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외적인 요소가 아닌 메시지에 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시대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영화는 맷 데이먼이 연기한 카루즈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그는 실력이 출중하나 영주에게 미움을 사 계속해서 명예가 실추되고 있는 인물이다. 카루즈는 마르그리트(조디 코머)에게 홀딱 반해 청혼을 신청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간다. 비록 승진이 원활하지 않고 주변은 도와주지 않지만 아내와 어머니를 먹여살리기 위해 용병으로서 전쟁에도 자주 참전한다. 그러나 카루즈가 자리를 비운 사이 마르그리트를 호시탐탐 노리던 자크(아담 드라이버)가 부정한 일을 저질렀고 분노한 카루즈와 마르그리트는 당시 왕이던 샤를6세에게 직접 재판을 신청한다. 각자 입장이 너무도 완강하여 판결이 어려웠고, 왕은 카루즈와 자크에게 결투 재판을 통해 진실을 가리라고 명령한다. 이 때, 서사의 속도는 상당히 빠르다. 눈 깜짝할 사이에 1, 2년은 훌쩍훌쩍 지나간다. 처음엔 갸우뚱했다. 너무 설명 없이 시간이 흐르는게 아닌가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첫 시점엔 카루즈의 시점이 끝나고 나면 친구의 아내를 탐한 자크의 시점이 시작된다. 같은 시간대의 다른 인물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자크의 이야기가 끝나면 이 진흙탕과도 같은 영화에서 '사실'로 여겨지는 마르그리트의 시점이 전개된다. 이같이 세 인물의 입장을 차례로 보여주며 영화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영화는 실제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마지막 결투 재판을 다룬다. 친구에게 아내를 겁탈당한 사내와 친구의 아내를 겁탈한 사내가 관중이 보는 앞에서 진실을 두고 공방을 펼치는 것이다. 물론 패배의 대가는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보다 더 쓰라린 상처는 명예의 실추다. 카루즈는 안 그래도 밑바닥인 명예를 모두 잃고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힐 것이며, 자크는 성공가도에서 내려와 씁쓸한 패배감을 맛봐야 할 것이다. 물론 카루즈가 지면 마르그리트는 거짓 증언을 한 것으로 판명되어, 산 채로 발가벗겨져 화형을 당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웃긴 점은 '모욕적인 일을 당한 사람은 마르그리트'라는 사실이다. 두 남자의 팽팽한 신경전과 쓸모 없는 자존심 싸움은 본질을 흐린다. 정작 억울한 사람은 마르그리트인데, 몇 마디 발언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카루즈의 승패가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꼴이 되었다. 이 부근쯤 오면 영화의 본질이 '페미니즘'과 '사회비판'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여러 페미니즘 영화가 있다. 남성의 위치를 전복시켜 여성의 우월함을 나타내는 부류도 있고,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며 억눌려있던 성별의 해방을 나타내는 부류도 있으며, 여성의 존재를 작고 연약하게 만들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부류도 있다. [라스트 듀얼]은 세 번째 경우에 속한다.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이 부족한 여성의 현실을 부각해 그들이 느끼는 억울함과 불공평함을 담아내고 있다. 심지어 배경은 여성이 남성의 재산으로 취급되었던 중세이니 그 메시지가 가진 뾰족함은 배가 될 것이다. 사실 이런 메시지는 뻔한 감이 있다. 부당한 여성의 처사를 나타내는 영화는 상당히 많고, 표현 방법이 거기서 거기기 때문이다. 또, 노골적인 표현과 대사로 메시지에 대한 거부감이 쉽게 든다. 그런데 이 영화는 노골적일지는 몰라도 뻔하거나 유치하지 않았다. 이는 상징을 잘 사용한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남자의 싸움과 개돼지들처럼 구경하고 물어뜯고 선동하는 관중, 이 모든 것을 재미로만 삼는 상류층의 모습의 표현은 여러 상징을 통해 나타낸다. 우선 여성을 남성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후계자를 생성하는 기계쯤으로 취급하는 마르그리트의 남편 카루즈는 자크와의 싸움에서 칼로 고환이 뚫린다. 이는 남성성의 상징에 생체기를 내어 허울뿐인 카루즈의 자존심과 명예를 무너뜨린다는 의미를 갖는다. 또, 마르그리트를 겁탈한 자크는 칼로 목이 뚫려 처참히 사망한다. 이는 부정한 일을 벌이고도 뻔뻔한 연기와 세치 혀로 자신의 행위를 사랑으로 포장하여 결백을 주장하던 자크의 목구멍에 '진실'을 박아 넣어 정의를 구현한 것이다. 두 주연 캐릭터의 싸움에서 그들이 상처를 입은 곳은 모두 마르그리트를, 한 명의 연약한 여성을 억압하던 일련의 상징들이었다. 또, 자신이 당한 일을 주변에 알려 모두가 진실을 알기 원했던 마르그리트에게 카루즈의 모친은 질책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도 예전에 같은 일을 당했으나 남편과 가정을 위해 꾹 참았다는 것이다. 마르그리트는 그녀에게 "그 덕에 얻은게 뭐냐"고 물었고, 그녀는 목숨을 부지했다고 대답한다. 이에 마르그리트는 그러기엔 너무 많은걸 포기하지 않았냐고 반문한다. 이는 지금껏 억눌린 채로 살아온 여성들에게 보내는 하나의 위로이자 앞으로는 달라지자고 말하는 다짐이라고 볼 수 있다. '페미니즘'의 메시지는 이렇게 완성된다.

 

 

그 다음은 '사회비판'이다. 이 또한 여러 상징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특이하게도 조연들과 설정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로는 왕이다. 샤를 6세는 진지하게 카루즈의 청을 고민하여 힘겹게 결투 재판을 선고하는 '척'을 한다. 어차피 샤를 6세의 입장에서 카루즈와 자크, 둘의 명예와 진실을 건 '라스트 듀얼'은 한낱 말단 직원들의 자존심 싸움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아이처럼 깔깔대며 둘의 전투를 기대하는 왕의 모습은 지루한 일상에 흥미를 가져올 싸움을 편히 관람하여 평가하고 결론내는 기득권층을 상징한다. 가장 충격적인 사회비판적 메시지는 바로 싸움을 구경하는 관중에게 있다. 그들은 카루즈와 자크 둘 모두에게 아무런 응원이나 질책을 하지 않는다. 적어도 싸움의 승패가 결정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자크의 패배가 확정되고 의기양양한 카루즈가 성을 빠져나갈 때 그에게 열렬히 쏟아지는 박수갈채를 보고 있노라면, 남들에 의해 내려진 결과에 따라 쉽게 바뀌는 우매한 대중의 편협한 취향을 상징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더하여 싸움에 진 자크의 시체에 몰려들어 죽은 자의 명예따위는 일절 신경쓰지 않고 옷과 귀중품을 훔쳐가는 관중의 모습을 보면, 패배가 확정된 사람을 더 가혹하게 대하며 치욕적인 비난을 서슴치 않는 대중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외에도 마르그리트의 친구이면서 기득권층의 결정에 따라 휘둘리며 편이 되어주지 않는 사람의 모습이나, 말도 안되는 논리로 무장하여 한 사람을 사냥하려는 판사들의 모습은 우리네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관계의 추악한 면을 잘 보여주며 '사회비판'의 메시지를 완성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중세'의 사건을 배경으로 여러 '상징'을 통해  '현대'의 양상을 비판하고 있다. 거기에 완벽한 표현으로 실제감을 높였고 매끄러운 서사로 극을 수월하게 이끌었다. 이런 방법은 세련되어 보인다. 물론 메시지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만큼 노골적이지만 기승전결이 완벽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높다. 그리고 이 영화가 진정으로 무서운 이유는 14세기에 일어난 사건을 21세기에 무리없이 대입하고 있다는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의 재산으로 취급받던 시절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러나 힘을 가진 자가 힘이 없는 자를 억누르는 현실과, 힘이 있는 자에 의해 결정된 가치에 따라 움직이는 다수의 편협한 행동은 그 무자비하고 무논리했던 시절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영화는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런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정말 베테랑 감독이어야만 가능하다고 본다. 뻔한 메시지를 뻔하지 않게 전달한다는 관점에서, 최근에 재관람한 [그래비티]와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메시지 말고도 앞서 말한대로 볼거리는 충분하니 극장 관람을 추천한다. 잘 만든 영화고, 좋은 영화다.

 

 

 

[The Last Duel]

서사 ★★★★☆
연출 ★★★★★
대사 ★★★★☆
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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