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 [데어 윌 비 블러드, 폴 토마스 앤더슨] 영화리뷰

by jundoll 2021. 8. 31. 11:36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연출하고

다니엘 데이 루이스, 폴 다노 등이 연기한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나에게 PTA에 입문시킨 친구가 다른 건 다 안 봐도 꼭 봐야 한다고 누누이 말했던 세 개의 PTA 영화 중 하나다. 다른 두 개는 [매그놀리아]와 [마스터]다. [매그놀리아]는 최고의 평을 남겼고, [마스터]는 아직 내가 이해하기엔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딱 그 사이에 있는 영화, PTA 유니버스의 분위기가 전환되는 시점의 영화, 군대에서 틀었다가 20분 만에 껐었던 그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시간 단축 마법을 부리는 영화다. 시간을 단축시킨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만 내가 느끼는 시간이 실제 시간보다 줄어드는 경험은 누구나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학원 가기 전에 들린 피시방에서 딱 1시간 동안 즐기는 게임의 시간, 군대에서 주어지는 자유시간인 개인정비 시간,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재밌게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 무언가에 몰입한 무아지경의 상태가 되면 우리는 시간이라는 개념의 속박에서 벗어나 초월하는 경험을 한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그런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느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러닝타임은 무려 2시간 38분이다. 물론 3시간이 넘어가는 [매그놀리아]에 비하면 소박한 수준이지만 이는 분명 점점 짧아지는 요즘 콘텐츠의 소모시간, 그러니까 유튜브나 틱톡, 인스타그램의 릴스같이 길게는 10분 짧으면 10초 안에 끝나는 콘텐츠가 주를 이뤄가는 세상에서 선뜻 선택되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요즘 SNS 콘텐츠에 중독된 사람은 고작 -짧은 장편영화 러닝타임인- 1시간 30분의 시간도 버티지 못하는 게 현실인데 2시간 38분을 내내 집중한다는 것은 이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내가 장담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드라마 장르를 좋아하고 강렬한 연기를 좋아하며 미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는 상태에서 찐한 영화 한 편, 시간이 잘 가고 여운도 남는 그런 영화 한 편 보고 싶다면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분명 그 어떤 영화보다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영화는 실제 배우와 같은 이름인 다니엘(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자전적 이야기로 꾸려진다. 그는 석유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석유 덕후다. 가족 따윈 다 내친 지 오래고 사고 현장에서 죽은 인부의 아들을 '자신의 인상을 좋게 만드는 가면'으로 사용할 생각을 하고 입양한 진정한 돈미새 -돈에 미친 새끼- 이다. 또, 남 잘 되는 꼴을 못 보고 언제나 남의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가야 직성이 풀리는 괴팍한 사업가 기질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를 가르치려고 하거나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하면 소위 '꼭지가 돌아'버리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수완은 또 좋다. 엄청난 양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 땅을 잘도 발견하고 거대한 회사와 연계하여 사업을 큼직큼직하게 잘 늘려 결국엔 대부호가 되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수많은 동화와 우화에서 배웠듯 질투쟁이에 욕심쟁이에 독단쟁이는 끝이 그리 좋지 못하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도 한참 후에 알게 됐고, 동생도 타지에서 결핵으로 죽었으며, 하나뿐인 -친자식은 아닌- 아들은 공사 중 사고로 귀가 멀고 성인이 된 후에는 그와 갈라서게 된다. 다니엘은 원하던 대부호가 됐을지언정 그의 야심처럼 넓지만 공허한 집에서 홀로 쓸쓸히 늙어 죽을 일만 남은 것이다.

 

 

그때 그를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일라이(폴 다노). 다니엘이 자본에 미쳐 있었다면 일라이는 신앙에 미쳐 있는 사람이다. 다니엘의 이야기가 주를 이룸에도 이 영화는 확실한 대결 구도를 지니고 있다. 다니엘과 일라이. 이름을 빼고 보면  '석유에 미친 남자'와 '종교에 미친 남자'. 조금 더 간결하게 '자본'과 '신앙'. 미국의 근간을 이루는 두 정신, 자본주의 정신과 개신교 정신이 확연하게 대립하는 시기를 그리고 있는 만큼 두 주인공도 자기만의 목표가 확실하다. 문제는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생각에 굴복시키려고 하는 것에서 출발하는데, 다니엘은 일라이가 거짓 신앙으로 사람들을 선동한다고 생각하고 일라이는 다니엘이 교회에 돈을 기부해주기를 바란다. 둘은 추구하는 바는 다르지만 본질이 같은 사람이었다. 둘 다 최고가 되고 싶고 둘 다 게다가 석유지대 선데이 농장주의 아들이어서 초반부터 다니엘과 투닥투닥하던 사이기도 했다. 소위 잘 나가는 신도였던 일라이는 타 지역으로 선교활동을 나갔었지만 대공황을 겪으면서 잘 풀리지 않자 절박한 심정으로 다니엘을 찾아온 것이었다. 

 

 

영화는 이 순간을 위해 꽤 오랜 시간을 끌어 왔다. 둘의 팽팽한 긴장감을 계속 유지하기도 했고 자본과 신앙이라는 두 매개를 이용해 엎치락뒤치락 관계가 역전되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그 결판, 각자 모든 것을 잃은 상태에서의 결착이 드디어 완성된 것이다. 다니엘은 한 때 송유관을 뚫기 위해 한 농장주의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이때 어쩔 수 없이 일라이에게 세례를 받으며 -세례라고 쓰고 뺨세례라고 읽는다- 치욕을 당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다니엘은 일라이에게 그 치욕을 갚아 주 기려도 하려는 듯 "나는 가짜 선지자이며 신은 없다"라고 여러 번 외치게 만든다. 그러나 애초에 일라이가 원하는 것을 절대 들어줄 생각이 없었던 다니엘은 그를 조롱하며 비웃었고, 더 이상의 모욕을 참을 수 없는 일라이가 달려들고 일련의 소동 끝에 결국 -아무런 반전 없이- 다니엘에게 볼링핀으로 머리가 터지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일라이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피, 너무도 붉고 어두워 자칫 석유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피를 보여주며 끝이 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반전이랄 게 없다. 다니엘이 돈에 미쳤었던 삶을 후회하며 교화되는 반전도 없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반전도 없으며, 다니엘과 일라이가 함께 행복해지는 그런 반전은 전혀 아무 데도 없다. 돈에 찌들고 기름에 찌든 자본주의의 밑 낯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가 승리했다. 아마 일라이를 무참히 살해한 다니엘은 그리 상황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게 분명하다. 돈이 많으니까 말이다. 돈이 전부인 세상에서 돈이 많은데 뭐가 달라지겠는가. 욕망으로 빚어낸 한 편의 끔찍한 서사시는 피인지 기름인지 모를 끈적한 액체에 빠진 한 인간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반전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예상한 비극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극이 끝나지 않았으니 그곳엔 당연히 피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영화의 연출적 표현적인 방법은 두 말하면 입 아프다. [매그놀리아]에서 느꼈던 그 홀리는 내러티브와 끝내주는 음악, 묵직한 한 방은 이 영화에서 더 세련되고 압축된 방식으로 표현된다. 위험한 시추작업에서 생기는 서스펜스도, 귀가 멀어버린 다니엘의 아들 시점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청각적 연출도, 여러 부분에 숨겨진 복선들도 극에 몰입을 도와주는 훌륭한 연출적 요소들이다. 맨 처음에 말했듯이 영화는 정말 빠져든다. [부기 나이트]처럼 친절하고 [매그놀리아]처럼 충격적이며 [마스터]처럼 비극적이다. 

 

언젠가 아버지랑 대화를 한 적이 있다. 제일 좋아하는 배우가 누구냐고 여쭤봤을 때 아버지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다니엘 데이 루이스'라고 하셨다. 사실 잘 모르는 배우다. 오스카를 네 번 수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의 영화를 단 한 편도 보지 않았다. 나름 영화의 'ㅇ' 정도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한참 멀었나 보다. 이번 영화에서 그의 힘을 제대로 느꼈다. 그는 진심으로 위대한 배우다. 그가 일라이의 가상의 밀크셰이크를 빨아먹을 때 내가 마시던 물도 빨리는 기분이었다. 위대한 배우의 힘을 느끼면 기분이 좋다. 봐야 할 영화가 늘어나거든. 다시 달려봐야지.

 

 

 

[There will be blood]

서사 ★★★★★
연출 ★★★★★
대사 ★★★★
연기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