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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롤리타, 스탠리 큐브릭] 영화리뷰

by jundoll 2021. 8. 27. 15:23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연출하고

제임스 메이슨, 수 라이언 등이 연기한다.

 

이 영화는 금기를 다룬다. 어느 나라에서도 인정받을 수 없는 아동에 대한 성적 집착, 그러니까 페도필리아나 헤베필리아 같은 성도착증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1962년에 연출한 영화 [롤리타]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를 원작으로 두고 있다. 우리가 현대의 시점에서 흔히 어린아이들에게 성적 감정을 품는 사람들을 '로리타'라고 부르는 것도 이 소설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그런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애초에 '로리타'는 잘못된 표현이고 '롤리타'가 맞다는 것이다. 게다가 '롤리타'는 소녀에게 집착하는 아저씨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어른의 관심을 끌고 싶고 어른에게 관심이 있는 소녀를 지칭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특히 이 영화는 그런 텍스트에서 봐야만 자연스러운 전개를 느낄 수 있다. 아무리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이 소녀에게 사랑에 빠진 성인 남성의 이야기를 다룬다지만 영화의 근본적인 뿌리에는 성인 남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소녀의 감정이 짙게 깔려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볼 때 우리는 통념적인 시선을 거둬야 한다. 이 영화는 겉으로는  추악하고 더러운 아저씨의 소녀에 대한 집착으로 얼룩진 사랑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실상은 성인 남성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 소녀와 그 소녀의 매력에 이끌린 성인 남성의 뒤틀리고 엇갈린 감정의 이야기로 봐야 하는 것이다. 만약 기존에 깔려있는 '로리타'라는 단어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이제 이 영화를 볼 준비는 다 한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영화는 참 친절하다. 시작부터 끝까지 설명해주지 않는 관계나 상태, 상황과 배경은 없다. 모두 설명이 되고 숨겨져 있다고 해도 그리 어렵지 않다. 대게 큐브릭 감독의 영화가 그렇듯 신박한 연출과 빠져드는 내레이션을 활용한 내러티브는 언제나 최상의 영화언어를 보여준다. 특히 이전 초기작들에 비해 전개는 더 빨라졌고 어수룩하지 않은 편집을 통해 합리적인 서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을 찾으라고 하면 연출이나 전개 같은 감독의 역량적인 부분에서는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 신경 쓰이는 것은 롤리타의 모습이다. 영화는 소설에 근본을 두고 있고 소설에서 롤리타는 12세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위의 사진에 있는 롤리타의 모습은 12세라고 하기엔 다소 나이가 들어 보인다. 잘 봐줘야 16세 많게 보면 20대 초반까지도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동양과 서양의 발육적인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으나 원작인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가진 상징적인 롤리타의 이미지와는 다소 차이가 나 보인다. 그래서 영화에 큰 집중을 하기가 힘들기도 하다. 분명 소녀를 사랑하는 성인 남성의 도착적인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봐야 그 끔찍함과 추악함을 몸소 느낄 수 있는데 그냥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는 커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저 내 견해지만 큐브릭 감독은 아마 소재가 가지고 있는 파격성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찍어내고 있는 시점이기도 했고 미국에서 소아성애자에 대한 시선이 그 어떤 범죄자에 대한 시선보다 월등히 혹독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상징적 인물의 외관적 어색함이 오히려 지금 시점에서는 더 깔끔하고 대중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는 영화의 윤리성이 곧다는 것이다. 아무리 원작으로 삼고 있는 나보코프의 [롤리타]에서 성인남성과 소녀의 폭력적인 성적 관계에 대한 언급이 있다고 해도 그걸 영상화하는 것은 영화의 윤리성을 해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문학과 영화는 엄연히 다르니까 말이다. 터부시되는 비주얼을 굳이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영화라는 매체가 쉽게 해칠 수 있는 시각적 윤리성을 지킨 감독의 일말의 저항도 이 영화가 가진 긍정적인 측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이 영화는 '소아성애적 텍스트'를 시각적으로나 문맥적으로 걷어낸 뒤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내가 느낀 큐브릭의 [롤리타]는 원작이 가진 그 추악함을 살짝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원작에서는 대학교 교수인 험버트가 12살의 돌로레스(돌로레스의 애칭이 롤리타)에게 사랑을 강요하는 모습에서 '욕망의 추악함'을 보여주고 있다면 영화에서는 험버트와 샬롯, 샬롯과 롤리타, 험버트와 롤리타, 롤리타와 퀼티의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틀에 가두고 기대하는 모습에서 '집착의 추악함'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누군가를 선망하고 사랑하는 행동 자체의 이면엔 상대방의 감정이 나와 같기를 기대하고 상대방의 모습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길 바라는 집착적인 관계의 역설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본성적인 모습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된다. 처음에 샬롯(롤리타의 엄마)(셸리 윈터스)은 자신의 집에 하숙을 하게 된 험버트에 대해 강한 이끌림을 느낀다. 그는 파리 출신이고 높은 학력을 가진 지식인이다. 그리고 샬롯은 겉으로 보기엔 유럽 문화, 그러니까 엘리트적이면서 고고하고 우아한 문화에 박식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남편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외로운 과부일 뿐이다. 샬롯이 험버트에게 푹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무한의 구애 끝에 어찌어찌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샬롯은 험버트에게 어떤 모습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당장 자살해버리겠다고도 하고, 자신의 외로움을 무한정 달래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결국 험버트가 롤리타에게 관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샬롯은 집을 뛰쳐나갔고 얼떨결에 차에 치여 목숨을 잃게 된다. 이것이 영화의 첫 번째 집착의 추악함으로 인한 파멸이다. 샬롯은 험버트가 자신이 가진 유럽 세계에 대한 선망을 채워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또한 죽은 남편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욕망의 그릇이 되기를 바랐다. 오로지 자기만을 바라봐주길 바랬던 험버트가 자신의 딸을 사랑하는 모습을 본 샬롯의 최후는 그렇게 어이없게도 끝이 났다. 

 

 

그렇다면 롤리타는 어떨까.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진상이 드러나는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엔 어떤 집착이 있었을까. 그녀는 그녀를 사랑했던 험버트의 염원과는 달리 단 한 번도 험버트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었던 적이 없다. 롤리타는 처음부터 인기 라디오 작가이자 곧 할리우드로 진출할 퀼티(피터 셀러스)에게 푹 빠져 있었다. 푹 빠져 있다는게 성적 욕망을 느낀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누군가를 아끼고 좋아하는 진심 어린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선망의 감정이라서 이는 샬롯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그녀는 어린애들끼리 하는 파티에는 관심이 없었고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며 어머니라는 작자는 항상 자기를 구박하고 질투까지 하는 모양새다. 그러니 어쩌면 롤리타가 성인 남성에게 인정받고 싶고 더 멋진 성인 남성을 좋아하게 되는 것도 당연할지도 모른다. 부재에 의해 자연적으로 생겨난 관심인 것이다. 그러니 험버트와 관계를 맺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고 퀼티를 연모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다만 문제는 자신의 의붓아버지지만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끔찍히 아끼는 험버트는 자기가 원하는 성인 남성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롤리타는 그 나이대 애들이 그렇듯 당연하게도 힙(hip)한 사람을 좋아한다. 롤리타는 그저 그 연령대가 더 높을 뿐이다. 퀼티는 곧 할리우드에 진출할 예술가이자 대스타다. 생긴 것도 잘 생겼고 나름 험버트보다 젊기도 하다. 반면에 험버트는 고리타분한 문학과 시를 가르치고 고전 문학의 문장 한 줄에 감동받는 전형적인 문과 감성을 지니고 있다. 또, 학교에서 하는 연극에 대해 노는 애들이나 한다는 부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고 재밌는 친구들은 모두 나쁜 양아치들이라고 생각하는 꼰대 마인드도 탑재하고 있다. 도저히 롤리타가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롤리타는 자신의 틀에 맞는, 그러니까 힙한 퀼티를 따라나서게 된다. 그러나 그 멋쟁이 퀼티 조차도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퀼티는 어린아이들을 데려다가 예술 영화라고 포장한 포르노를 찍는 정신 나간 인간이었고 그런 성인 남성의 추악한 면을 느낀 롤리타는 이내 도망쳐 약간은 모자란 남자를 만나 쓰러져가는 집에서 살게 된다. 이것이 영화의 두 번째 집착의 추악함으로 인한 파멸이다. 롤리타는 경제적 풍요에 집착했다. 험버트의 뒤틀린 욕망을 이용하여 퀼티에게 접근하기 위한 토대를 쌓았다. 물론 퀼티가 롤리타에게 매력을 느껴 접근한 것도 있지만 그녀는 침대 바로 옆에 퀼티의 포스터를 붙여둘 정도로 그를 연모했다. 마치 험버트가 자신의 침대 옆에 롤리타의 사진을 둔 것처럼 말이다. 경제적 풍요와 독립, 성공을 바란 어린 롤리타는 이제 삐걱거리는 집에서 맛없는 커피를 마시며 모자란 남편과 애를 키우며 살아야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비극이다.

 

 

이제 영화의 진 주인공 험버트의 이야기를 해 보자. 험버트는 우리가 이미 잘 알듯이(?) 롤리타에게 연인의 감정을 품은 대학 교수다. 티는 내지 않지만 자신의 학업적 성취에 큰 의의를 두고 있으며 자신의 직업에도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어디서나 프랑스어 강의를 할 수 있다고 하기도 하고 시 한 줄, 한 문장에 감동받으면서 이를 멋지다고 생각하는 흔한 엘리트주의에 빠져 자아도취하는 중년 남성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롤리타의 엄마인 샬롯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우습게도 험버트는 샬롯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결하지 않기 때문에. 샬롯의 눈에 험버트는 충분히 고결해 보였지만, 험버트의 눈에 샬롯은 몸의 쾌락과 겉멋뿐인 의식에 사로잡힌 지조없는 과부였을 뿐이다. 성적으로 거리낌 없고 자신을 유혹하는 샬롯의 모습에 강한 거부감을 느낀 험버트는 그녀의 딸 롤리타에게, 더럽혀지지 않아 고결하며 절개와 지조를 지키는 -물론 12살이라 지키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그녀에게 홀딱 반하게 된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롤리타의 욕망, 그러니까 험버트의 헛된 기준에 살짝 벗어나지만 또 그마저 더욱 매력적이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길티 플레저를 느끼며 점차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험버트는 롤리타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막대사탕 같이 톡톡 튀는 롤리타의 개성을 점점 제한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진정한 집착이 시작된 것이다. 학교가 4시에 끝났는데 6시에 왔다고 뭐라고 하질 않나, 피아노 학원을 빠지고 놀러 갔다고 뭐라고 하질 않나, 학교 연극에 참가한다고 뭐라고 하질 않나, 연극이 끝난 뒤 뒤풀이 파티에도 못 가게 하질 않나 별 짓을 다 한다. 참으로 잘못된 방식, 참으로 어수룩한 방식, 참으로 간악한 방법으로 자신의 틀 안에 그녀를 가둔 것이다. 이것이 영화의 세 번째 집착의 추악함으로 인한 파멸이다. 그는 롤리타의 그런 모습이 계속되기를 원했다. 롤리타가 성숙해져서 다른 여자와 같아지는 것이, 사랑을 알고 남자를 알고 세상을 알아가는 게 싫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그녀를 가두고 윽박지르고 자신의 틀에 맞추려고 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롤리타는 12살이다. 12살은 정말 만물에 관심이 가고 선망의 대상이 하루에 한 명씩 바뀌는 때다. 나도 그랬고 너도 그랬으며 험버트도 그랬다. 심지어 롤리타는 누구보다 빨리 성숙해지고 싶었다. 그러니 이제 둘의 결말은 안봐도 눈에 선하다. 롤리타는 애초에 험버트를 사랑한 적이 없고 험버트는 롤리타가 변하지 않길 바라면서 억압하고 집착했다. 결국 롤리타를 잃은 험버트는 이제 삶의 목적과 이유가 모두 사라진 것이다. 

 

영화의 결말부는 험버트의 추악함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며 끝이 난다. 험버트로부터 도망친 롤리타는 다른 남자와 가정을 꾸리고 3년간 잠적해 있다가 돈이 다 떨어지자 험버트에게 도움의 편지를 보낸다. 험버트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 롤리타가 사는 곳으로 가게 되고 그녀는 이미 완전히 정착하여 임신까지 한 상태였다. 돈을 지원해달라는 롤리타와 그녀의 남편을 본 험버트는 -안경도 쓰고 임신도 한 롤리타의 모습에- 놀란 기색이었지만 지금이라도 자기와 함께 떠나자고 간곡하게 부탁한다. 그의 지질한 모습에 질린 롤리타는 부르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고 다시 그에게 냉정하고 차갑게 대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험버트는 끝내 롤리타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쥐어주고 롤리타는 그제야 험버트에게 미소를 지어주며 우는 그를 달래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제 험버트가 사랑했던 롤리타는 어디에도 없다. 성공을 위해 따라갔던 퀼티에게서 도망친 롤리타는 험버트가 그렇게 증오했던 속물적이고 지조가 없는 여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돈을 받고 나서야 마음이 열리는 롤리타를 보며 이제 자기가 사랑했던 마리아와 비슷한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는 것을 깨달은 험버트는 롤리타가 연락을 하고 살자는 말에도 샬롯을 대했던 그 차가운 모습으로 롤리타를 남겨둔 채 떠나고 만다. 정말 끝인 것이다. 그녀에게 돈을 쥐어준 뒤 아이처럼 엉엉 우는 험버트의 모습은 연민의 감정이 느껴진다기보다는 뒤틀린 사랑의 적법한 판결을 받은 한 명의 쓸쓸한 범죄저처럼 보일 뿐이다. 

 

 

영화의 메시지는 명료하다. 사랑이라는건 정말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는 기대는 더 부서지기 쉽다. 이 영화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모습과 행동을 바란 인물들은 그 집착으로 인해 스스로 파멸한다. 험버트를 자신의 틀에 가두려 했던 샬롯도, 롤리타를 자신의 틀에 가두려 했던 험버트도, 퀼티가 자신에게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줄 것이라 생각한 롤리타도 모두 씁쓸한 최후를 맞았다. 샬롯은 사고로 죽고 험버트는 롤리타를 잃었으며 롤리타는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퀼티는 모든 것을 잃은 험버트에게 총을 맞고 죽는다. 그러니까 사랑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를 사랑하면서 자신의 틀 안에 가두는 사랑의 이면, 사랑의 말로, 사랑의 최후를 노래하는 것이다. 거기에 이미 유명한 소설인 [롤리타] 속 등장하는 여러 뒤틀린 사랑의 모습을 이용해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어려운 단어로 구구절절 표현하지 않아도 될 만큼 명료하다. 그리고 이 영화도 당연히 그만큼 쉽고 직설적이며 감정적이다. 아마 스탠리 큐브릭의 [롤리타]는 그의 영화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이야기일 것이다.

 

글이 길었다. 큐브릭의 팬이어서 그가 연출한 [롤리타]가 가지고 있는 상징의 부정적인 면을 대변하기 위해 이렇게 길게 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히 이 영화는 살짝은 불쾌할지언정 더럽지는 않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여자아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장면이나 남성의 성적 쾌락을 위해 여성을 소비하는 장면 등 뻔하디 뻔한 더러운 연출은 일체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편하게 볼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정말 '사랑 이야기'다. 물론 아주 많이 뒤틀린.

 

 

 

[Lolita]

서사 ★★★★
연출 ★★★★
대사 ★★★
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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