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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 [만화의 이해, 스콧 맥클라우드] 도서리뷰

by jundoll 2021. 7. 14. 21:00

 

 

전공과 관심사가 같은 친구(에반게리온을 추천해줬던 그)의 집에 놀러 갔을 때 눈에 띄어 빌려온 책. 그 친구가 말하길 건국대학교 어느 교수님이 디자인을 전공한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세 가지 필독서 중 한 권이라고 소개한 책이라고 했다. 너가 읽으면 좋아할 것 같다며, 읽으면서 내 생각이 났다며 기꺼이 빌려줬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어떤 것을 소개해준다는 것은 어쩌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선물을 사기 위해 선물을 사는 것과 무심코 그 사람이 생각나 선물을 하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다고 본다. 굳이 떠올리려고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생각날 만큼 자신에게 큰 존재로 자리 잡아 있다는 것이니. 적어도 나는 친구에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친구도 내게 그런 사람이니까.

 

뭐 오글거리는 소리는 이쯤 하고 책에 대한 간단한 리뷰를 적어보려고 한다. 1993년, 나의 친형과 동갑인 이 책은 2008년 비즈앤비즈에서 한국어로 옮겨 출간됐다. 상당한 기간이 지난 도서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70년대에 출간된 얀 치홀트의 [신 타이포그래피]가 지금도 모더니즘 타이포그래피의 교과서로 불리듯이 탄탄한 기반과 세련된 내용으로 가득 차있다. 책은 오직 '만화'에 대해서 다루지만 그 만화가 포함되어있는 '예술'에 관해서도 많은 해석과 시사점을 던져준다. 특히 훌륭했던 내용은 만화의 칸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내용과 글과 그림의 싸움, 예술 형식의 탄생 과정속 길을 찾아 헤매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내용. 아주 매력적이고 기발한 책이다. 이 책에서 작가가 찬양하는 또 다른 만화에 대한 책(만화와 연속예술 / 윌 아이스너)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 책의 가장 놀라운 점은 만화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그니까 말 그대로 만화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칸과 칸이 나뉘어 있고 글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매혹적이고 효과적인 삽화가 곳곳에 넘치고 있다. 그냥 글만 쓰는 것과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는 것은 두 배, 세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 두 세 배의 노력은 곧 독자의 인지를 다분히 편하고 쉽게 만들어 더 깊고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또한 숙 숙 읽히기도 하고. 아는 사람만 알겠지만. 어릴 때 [무인도에서 살아남기]라는 책은 '소설판'과 '만화판'이 별개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딱 펼쳤는데 글만 있으면 상당히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이 [만화의 이해]는 어느 정도 견문이 쌓여야만 더 쉽게 볼 수 있는 책이지만 만화의 형식을 빌리고 있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상당히 낮다는 점이 이 책을 다른 미학적 교양도서와의 차별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훌륭한 책이다. 

 

 

나는 어릴때부터 만화를 참 좋아했다. 9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Half 디지털 세대'여서 한창 투니버스와 챔프 애니메이션을 접할 세대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만화책방에 가서 쪼그린 자세로 몇 시간씩이나 만화책을 탐닉하곤 했다. 물론 일본 만화만. 아직도 종이 만화책 문화가 자리잡지 않은 한국이라 (오히려 지나갔다고 하는 게 맞겠다.) 만화책방엔 일본 작품밖에 없었다. 당시는 한창 만화 붐을 일으킨 1세대 만화들이 저물고 [나루토], [원피스], [헌터x헌터] 등 1세대의 진중함에 스타일리시를 더한 의미 있는 작품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 만화방 안에는 늘 새로운 신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설레고 행복했던 시절이다. 아직도 그 만화방의 위치와 냄새를 잊지 못한다. 아직도 나루토가 나선환을 배웠을 때를 잊지 못한다. 나는 지금도 만화를 본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미디어 믹스도 자주 챙겨본다. 최근에는 [진격의 거인]의 결말을 보며 눈물을 흘렸고 친구들을 만나면 [귀멸의 칼날]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기도 한다. 나는 만화의 '크게 몰입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휘발성'을 참 좋아했다. 영화는 보면 심히 몰입이 된다. 같은 사람이니까. 근데 만화 속 등장인물은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카툰화' 되어있기 때문에 적당한 몰입과 적당한 거리두기를 할 수 있어서 그만큼 편하고 제멋대로 봤다. 그래서 내심 만화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자백하고 싶다.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만화의 이해]는 참 의미가 깊은 책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만화를 '예술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내가 규정지었던 예술은 삶에 큰 도움은 주지 않을지언정 영혼을 채워주는 마술이었고, 만화는 그저 심심풀이 땅콩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편협한 생각을 바꾸는 데 아주 큰 도움을 줬다. 왜냐, 정리되어 있으니까. 만화에 대한 단계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이 책 전반을 아우르고 있으니까. 책에게 꼼짝 못 하고 설득을 당한 것이다. 흡인력이 아주 강한 책이다. 앞으로 만화는 나에게 또다른 예술로 다가올 것이다. 물론 그만큼의 예술성을 갖춰야 하겠지만. 

 

물론 이 책은 일본 서브컬쳐나 만화의 방식에 대해서는 쉽게 다뤄주지 않는다. 작가는 미국 만화가니까. 그럼에도 만화의 방식이나 탄생 과정은 그다지 다를 바 없기 때문에 그리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한 문화에 대한 여러 국가의 시선을 알고 있는 것은 당연히 도움이 된다. 여러모로 재밌게 읽었다. 다음엔 일본 만화에 대한 책을 읽어 봐야겠다. 책을 추천해준 '이카리 군'(에반게리온을 추천해준 친구의 별명이다. 언제나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는 짧게 부르는 게 아무래도 편하지 않겠나)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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