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스틴 대니얼 크레턴이 쇼러너를 맡고 야히아 압둘마틴 2세, 벤 킹슬리, 드미트리우스 그로스 등이 연기한다. 디즈니+에서 공개된 8부작 시리즈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페이즈 6에 속하지만 그 껍데기는 사뭇 다르다. 제목 '원더맨(Wonder Man)'은 직역하면 '경이로운 사람'이다. 하지만 'Wonder'에는 '궁금해하다', '의구심을 품다'라는 뜻도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자문하는 주인공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 제목은 영웅의 호칭이라기보다 실존적 질문에 가깝다. 초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인간이 되기를 갈망하는 자의 아이러니가 제목에서부터 읽힌다.

주인공 사이먼 윌리엄스(야히아 압둘마틴 2세)는 할리우드의 무명 배우다. 오디션 장을 전전하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거절뿐이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전설적인 감독 본 코박이 연출하는 슈퍼히어로 영화 '원더맨'의 리메이크 주연 오디션이다. 사이먼은 그 과정에서 한물간 배우이자 과거 '만다린'이라는 희대의 사기극을 벌였던 트레버 슬래터리(벤 킹슬리)를 만나 기묘한 우정을 쌓는다. 하지만 사이먼에겐 치명적인 비밀이 있다. 그는 실제로 강력한 이온 에너지를 다루는 초능력자다. MCU 내 할리우드에는 초능력자의 연예계 활동을 금지하는 '도어맨 조항(Doorman Clause)'이 존재하기에, 그는 자신의 본모습을 철저히 숨긴 채 '연기하는 척'을 해야만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한다.

포스터와 타이틀 로고를 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마블 특유의 웅장한 3D 렌더링이나 금속 질감의 블록버스터급 타이포그래피는 온데간데없다. 지극히 평범한 Serif 계열의 폰트, 그것도 마치 워드 프로세서 기본 폰트인 Times New Roman을 연상시키는 건조한 서체가 떡하니 박혀있다. 유치한 쫄쫄이 타이즈 감성을 기대했다면 실망했겠지만, 나는 오히려 이 지점에서 무릎을 쳤다. 이것은 "나는 히어로물이 아니라 드라마"라고 웅변하는 디자인이다. 영화 대본의 표지처럼 투박하고 정직한 폰트는 주인공이 갈망하는 '진정성 있는 배우'의 꿈을 시각화한다. 화려한 그래픽 노블이 아니라 흑백 희곡집 같은 디자인. 디즈니 특유의 과장된 채도를 뺀 채, 건조한 LA의 햇살과 배우들의 땀방울에 집중한 미장센은 이 시리즈가 가진 태도를 명확히 보여준다.

솔직히 말해서 전개는 느리다. 아니, 지루하다. 액션 쾌감을 기대하고 들어온 관객들은 3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가는 바로 그 '지루한' 드라마에 있다. 슈퍼히어로가 악당을 때려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배우가 배역을 따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야기다. 특히 벤 킹슬리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그는 '연기를 못하는 척 연기하는' 트레버 슬래터리를 연기하며, 다시 그 캐릭터가 진지하게 셰익스피어를 논하는 층위의 연기를 보여준다. 페이크와 리얼리티를 오가는 그의 눈빛은 이 시리즈를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이다. 물론 마블 팬들은 실망할 것이다. 빔을 쏘고 건물을 부수는 장면보다 대본 리딩 장면이 더 긴장감 넘치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이 작품은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적인 히어로물이 되었다.

'도어맨 조항'은 흥미로운 장치다. 힘을 가진 자는 무대 위에 설 수 없다니. 이는 초능력을 '재능'이 아닌 '불공정함' 혹은 '위협'으로 규정하는 사회적 합의다. 주인공 사이먼은 그 힘만 있으면 세상을 구할 수도, 혹은 빌런이 되어 지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건 고작 '연기로 인정받는 것'이다. 날 때부터 주어진 힘(초능력)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으로 획득한 능력(연기력)으로 성공하려는 욕망. 이것은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초인)'의 현대적 해석과도 같다. 주어진 운명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려는 의지. 진짜 초인적인 마인드는 건물을 들어 올리는 근력이 아니라, 편한 길을 두고 굳이 가시밭길을 걸어가려는 그 미련한 자존심에서 나온다.
슈퍼히어로 수트 대신 헐렁한 트레이닝복을 입은 마블의 이단아. 화려한 액션은 없지만, 배우라는 직업이 가진 페이소스가 그 빈자리를 꽉 채운다. 벤 킹슬리의 주름진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다. 팝콘보다는 쓴 에스프레소가 어울리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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