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루야 미노루의 여섯 번째 작품.
[심해어]는 네 권이다. [두더지]와 같은 분량이지만 훨씬 읽기 편하다. 뭐 글이 잘 읽힌다거나 그림이 매끄럽다 하는 이유가 아니라 우울의 색채가 짙지 않고, 악역이라고 부를만한 후루야 미노루식 빌런들이 판을 치지 않기 때문이다. 후루야 미노루 만화에는 꼭 비슷한 악인 부류, 소위 "잃을 것 없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잃을 대로 잃어서 아무것도 남지 않아, 흉악범죄를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소시오패스들이다. [심해어]에는 그런 다이나믹한 인간은 (별로) 없다. 물론 그로 인해 드라마성이 줄어든 것은 아쉽다.
사실 심해어는 살짝 심심한 정도다. 분명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으나, 사건이 적어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그린힐]과 [시가테라] 그 사이에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두워질 법 하면 밝아지고, 밝아질 법하면 어두워진다. 물론 [그린힐] 보다는 재미있다.
나는 그래도 [심해어]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드디어 처음으로 후루야 미노루식 사랑의 전개가 조금 뒤틀리기 때문이다. 후루야 미노루 만화에는 반드시 비합리적으로 주인공을 사랑하는 글래머 미녀 히로인이 등장한다. [그린힐]의 이발소 직원과 요코타, [두더지]의 치야자와, [시가테라]의 나구로. 이들의 공통점은 밑바닥 인생의 주인공을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한다는 것인데, 후루야 미노루 만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분명 어리둥절한 요소로서 일종의 진입장벽과도 같다. [심해어]의 주인공인 경비원 토미오카는 일면식도 없는 아저씨의 200만 엔이나 되는 빚을 갚아주고, 그 모습을 옆집의 글래머 미녀(...) 하다가 엿듣고는 지금껏 만나온 거짓투성이 남자들과는 다르다며 토미오카를 깊게 좋아하게 된다. 드디어! 나름의 이유가 생긴 것이다.
솔직히 이것도 100% 납득이 갈 만한 이유는 아니지만, 이정도면 후루야 미노루 만화치고 상당히 발전했다고 본다. [두더지] 이후로 이어지는 [시가테라]-[심해어]-[낮비]에서 자기 복제가 강하다는 이유로 꽤 많은 비판을 받은 후루야 미노루는 어쩌면 나름의 작은 발전을 꾀했던 것은 아닐까.
여러 가지로 종합해 봤을 때, [심해어]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우울한 주인공은 좋아해도, 우울한 만화는 싫어하는 사람
짧게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
여기부턴 결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야기가 모두 진행된 4권 말미에서 토미오카는 글래머 미녀.. 인 하다와 결혼을 약속하고 DVD방에서 새로운 일을 하고 있는 한편, 이전의 직장에서 괜히 엮였던 양아치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다. 이미 큼지막한 사건이 한 차례 지나갔고, 두 번째 직장에서 만난 선배인 사이토 군의 이야기도 얼레벌레 마무리가 되었다. 독자 입장에서는 이제 고독한 세월을 견딘 토미오카가 하다와 행복하게 결혼하고, 두 발 뻗고, 이불 꼭 덮고 행복하게 잠들면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러나 역시 후루야 미노루는 결말에 와서 그냥 보내주지 않는다. 토미오카를 쫓던 양아치 중 한 명이 급기야 DVD방을 찾아와 토미오카의 신변을 확인했고, 그의 지령서(?)에는 토미오카를 발견하면 바로 죽이라고 적혀 있었다.
정말 이 장면에서 치를 떨었다. 그냥 토미오카좀 제발 좀 행복하게 살게 냅둬!!! 라고 속으로 소리쳤다. 조마조마하면서 보던 찰나, 다행히 양아치는 갑자기 마음이 변했는지 귀찮다며 지령서를 풀숲에 버렸고, 토미오카는 질긴 목숨을 부지했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점은 그 바로 뒤에 이야기 흐름에 전혀 맞지 않는 신원 불명의 시체 컷이 하나 등장한다는 것이다. 처음엔 원고가 섞였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이해가 가지 않는 컷이었다.
분명 토미오카는 죽지 않았다. 양아치의 행동과 이 다음에 이어지는 내레이션을 보면 절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시체는 누구일까? 많은 의견이 있다. 하다와 만나지 않은 평행세계의 토미오카라는 말, 고독사한 토미오카라는 말, 하다라는 말, 양아치의 변덕으로 토미오카 대신 죽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 등 의견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신체의 비율이나 머리 길이로 따져 봤을 때 평행세계의 토미오카 설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일단 하다는 절대 아니다. 하다는 토미오카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쭉쭉빵빵 글래머 미녀..니까
토미오카는 정말 운이 좋다. 운명처럼 찾아온 옆 집 여자인 하다가 없었으면 토미오카는 진즉에 죽었다. 꼭 양아치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고독해서, 외로워서, 친구가 없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내면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토미오카는 네 번 죽음을 피한다. 운 좋게 숲 속 살인마의 총을 피하고, 운 좋게 아메카와의 도끼질을 피하고, 운 좋게 양아치의 변덕으로 목숨을 부지했으며 운 좋게 하다 덕에 고독사를 면했다. 그러니까 저 시체는 평행세계의 운 없는 토미오카의 변사체일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다른 의견도 들어보고 싶으니 혹시 있다면 댓글에 적어주길 바란다.
운이라는 요소덕에 토미오카는 어두컴컴하고 깊은 바닷속 외로이 헤엄치는 심해어에서 아름답게 사랑받는 황금잉어가 될 수 있었다. 자기만을 바라봐주는 미래가 창창한 아내와 이쁜 아이들을 키우고 살아갈 토미오카의 삶은 기쁨이 충만할 테다. 그런데 애석하다. 운이 아주 조금이라도 없었으면 길거리의 변사체가 되었을 것이라는 게.
그에게 닥치지 않은 가상의 불운이 애석한 이유는 아마 현실을 대입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만화가 아닌 현실 속 우리의 삶은 평행세계의 토미오카와 비슷할 가능성이 높다. 절대 운은 내가 바라는 대로 척척 달라붙지 않고, 나쁜 놈들은 어떻게든 나쁜 일을 저지른다. 우리는 만화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후루야 미노루가 단 한 컷에 잠깐 드러낸 현실 속에 산다. 그러니 본작이 모두 끝난 뒤 크레딧 페이지에 그려져 있는 심해어는 아마 토미오카가 아닌 이 만화를 보는 현실의 우리일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도 심해어보단 황금잉어가 되기를 바라는 우리는, 어쩌면 가당치도 않은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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