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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 [두더지, 후루야 미노루] 만화리뷰

by jundoll 2024. 7. 31. 11:12

 

 

후루야 미노루의 네 번째 작품.

 

[두더지]는 네 권이다. 보통 만화책 한 권 읽는데 30-40분 정도 소요된다고 치면, 넉넉잡아 2시간 30분이면 다 읽을 수 있다. 분량이 짧다고 해서 내용이 짧은 것은 아니다. 훌륭한 만화는 만화가 끝난 뒤에도 만화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두더지]는 개인적으로 후루야 미노루 만화 중에 최고다. 전작 [그린힐]에서 간간이 드러내던 작가의 우울함이 최고치를 찍었고, 완벽한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 세계가 [두더지]를 기점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두더지]에는 저질 개그도, 어이없는 흐름도, 허무한 결말도 없다. 진지하고, 상당히 우울하다.

 

본 포스팅은 조금 길 예정이니, 결론 먼저 말하자면,
[두더지]는 이런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우울한 만화가 땡기는 사람
우울한 사람이 주변에 있는 사람

역설적이게도 이 만화는 "우울한 사람"에게 추천하지 않는다. 헷갈리면 않았으면 좋겠다. 우울은 극단적 상황을 만든다. 따라서 우울은 치료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우울이 우울을 치료할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추천하지 않는다. [두더지]는 우울한 만화다. 이 만화는 우울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는 사람이 읽는 것이 좋다.

 

스포일러 조심.


 

[두더지]는 전반적으로 우울하다. 겉으로 보면 밝은 순간이 몇 차례 있지만 본질은 우울하다. 주인공인 스미다는 강도가 꽤 심한 우울증 환자고, 그가 내리는, 혹은 내리게 되는 선택은 다방면에서 우울하다. 그럼에도 [두더지]는 교육적이다. [두더지]에는 일침이 있다. 특히 "쿨찐"들의 명치에 강력하게 꽂는 진심펀치가 있다. "쿨찐"이라는 말은 마치 "뇌절"처럼, "핑프"처럼 풀어서 설명해야만 하는 개념을 단 두 음절로 명료히 나타내는 가성비 좋은 단어다. 아래에 훌륭한 설명이 있다.

 

 

웃자고 가져온 짤이지만 분명 날카롭게 분석했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주변 반응 탐색>이다. "쿨" 하려면 주변이 있어야 한다. 상황이, 상호작용이, 사건이 있어야 한다. 물론 그것들을 이루는 필수 요소는 단연 "타인"이다. 주위에 어떤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혼자 "쿨" 할 수 없다. 그리고 당연히 "쿨찐"도 될 수 없다.

 

[두더지]의 주인공 스미다는 엄청난 쿨찐이다. 스미다는 아무런 의욕도, 꿈도 없이 죽도록 평범한 삶을 원하고, 큰일이 일어나도 매사 시니컬하게 대응하는 쿨한 중학생이지만, 당연히 그것은 거짓 "쿨"이다. 어떤 상황이 되어도 변하지 않는 것을 진실이라고 한다면, 스미다의 "쿨"은 당연히 진짜가 아니며, "쿨"해 보이고 싶을 뿐이다. 스미다의 "쿨"이 거짓임을 밝히는 역할은 앞으로 소개할 [두더지]의 진짜 주인공이 훌륭히 해낸다.

 

 

이 괴물은 현실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스미다에게만 나타나는 환상이다. 스미다는 괴물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왜 자신을 그리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만화 밖에서 모든 상황을 관찰하는 우리야 괴물에 대해 파악하기 쉽겠지만, 고작 16살인 스미다는 저 비주얼을 그다지 대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저 괴물은 스미다의 진실이다. 그것도 아주 살떨리는 진짜 진실. 스미다의 속내, 스미다의 본질, 스미다 그 자체이자 애써 모른 척했던 진정한 본인. 스미다가 "쿨"하게 행동하느라 남 앞에서는 보인 적 없는, 보일 수 없는 모습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겠다. 괴물이 스미다를 놀리거나, 미세하게 비웃는 것은 스미다가 스스로 자신이 진정으로 쿨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괴물은 [두더지]에서 단 네 번, 한 권당 한 번 꼴로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괴물은 스미다가 혼자일 때 나타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미다가 주위에 아무도 없어 "쿨"할 수 없을 때 나타난다. 괴물은 쇼조도, 치야자와도, 경관아저씨도, 노숙자아저씨도, 엄마도, 아빠도 없을 때 나타난다. 스미다는 주위에 누군가 있어야만 쿨해질 수 있다. 쇼조가 있어야 그와의 우정에 쿨해질 수 있고, 치야자와가 있어야 그녀의 관심과 애정을 무시할 수 있으며, 만화가 친구가 있어야 그의 꿈을 향한 도전을 비웃을 수 있다.

 

 

처음엔 괴물의 외형을 보고 본작의 제목인 [두더지]가 괴물을 지칭한다고 생각했지만, 괴물이 스미다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면, [두더지]는 스미다가 혼자가 된 상태를 일컫는다. 두더지는 땅을 파고 들어가 어둠 속에 혼자가 된다. 스미다도 시끌벅적한 친구들이 떠나면, 어둠 속에서 혼자가 되어 진정한 자신을 마주한다. 후루야 미노루는 땅 속의 두더지가 자신의 고독을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매사 그렇게 쿨했던 스미다는 혼자(두더지 상태)가 되면 이다지도 끔찍한 모습의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그러니 스미다는 안간힘을 다해 피한다. 무섭게 생겨서 그런 것도 있겠다만, 진실을 마주하여 자신의 "쿨"이 겉치레임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쿨찐"은 중요한 것을 놓친다. 스미다는 쇼조를, 치야자와를, 건강을, 시간을, 기회를, 꿈을, 무엇보다 진실과 대면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친다.

 

 

스미다는 계속 쿨해야만 했다. 적어도 쿨할 때는 괴물이 자취를 감추니까. 그러나 쿨하려면 주변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행복을 꿈꾸게 된다. 스미다는 본인이 진짜로 행복하려면 결국 괴물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내내 행복과 우울의 간극에서 허우적댄다. 그리고 뻔하게도 스미다는 용기를 내지 못한다.

 

 

아무런 선택지도 내리지 못한 스미다는 결국 타의로 진실을 마주한다. 치야자와가 스미다를 지키기 위한 명목으로 경찰아저씨에게 사건(스미다가 자신의 친아버지를 살해한 것)의 진상을 실토했고, 다음날 수감될 예정이다. 평범함과는 많이 멀어지고, 평범해지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상태가 된다. 그제야 스미다는 "어쩔 수 없이" 진실을 마주한다. 스미다는 바짓가랑이를 잡는 심정으로, 혹시 진실이 어쩌면 그다지 처참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금껏 외면했던 진실과 대면한다.

 

 

진실은 잔인했고 일말의 용서도 없었다. 진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기에 스미다는 여리고, 또 준비가 되지 않았다. 스미다는 진실과 마주한 뒤 행복해질 수 있다는 모든 가능성을 내려놓고, 우울의 편에 선다. 스미다가 두가지 선택지 중 우울을 고른 것을 나약하다며 비난할 수 없다. 타의로 일어난 사고이기 때문이다. 수호천사라고 믿어온 치야자와의 신고는 준비가 되지 않은 스미다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치야자와의 행동은 정의의 편에서 옳은 것이었을지 몰라도, 스미다에겐 때 이른 사형선고였다.

 

 

준비가 되지 않은 이는 불완전한 선택을 한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는 자식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치면 자연스레 공부가 싫어진다. 자신의 본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스미다는 선택의 강요에 이끌려 가장 극단적인 선택을 내린다. 물론 원래 스미다의 목적은 일년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지만, 그 일 년은 사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기 위해 스스로 부여한 자기반성의 시간이었지 절대 고정불변의 규칙은 아니었다. 내년부터 금연한다는 사람은 내년이 되기 전까지 금연하지 않을 구실을 찾기 마련이다.

 

스미다를 아무 이유 없이 사랑했던 치야자와에 의해 스미다가 목숨을 끊은 건 아이러니하다. [두더지]는 주인공인 스미다가 우울증 환자라서 우울한 만화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우울에서 꺼내어주기 위해 행한 타인의 선의가 불러온 결과가 [두더지]를 깊이 우울하게 만든다.


이 만화를 "우울한 사람"이 아닌 "우울한 사람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추천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힘든 상황에 놓인 타인의 감정을 함부로 측정하여 선의라는 명목으로 도움 아닌 도움을 주려고 한다. 물론 좋은 마음에서 기인하겠지만, 기획이 선하다고 결과가 선한 것은 아니다. 굶고 있는 아기 길고양이를 구조해 키우는 게, 어미로부터 떼어놓는 행위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행한 나의 선의는 과연 오롯이, 그 목적에 걸맞은 선의로서 행해질까?
좋은 방법을 아는 사람은 댓글로 알려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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