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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 [시가테라, 후루야 미노루] 만화리뷰

by jundoll 2024. 7. 31. 11:36

 

 

후루야 미노루의 다섯 번째 작품.

 

후루야 미노루의 다섯 번째 만화. [시가테라]는 여섯 권이다. 짧디 짧은 작품의 연속인 후루야 미노루 작품들 사이에서 그나마 분량이 조금 있지만, 여전히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다. 게다가 [시가테라]는 극도로 우울하지도, 극도로 허무하지도 않다. 밸런스가 훌륭한 수작, [시가테라]는 불안과 행복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 타는, 질 나쁜 양아치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평범(?)한 주인공 오기노 유스케의 성장일지다.


본 포스팅은 조금 길 예정이니, 결론 먼저 말하자면,
[시가테라]는 이런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드라마 장르의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
너무 우울하지도, 너무 개그스럽지도 않은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
짧고 굵은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


본작은 후루야 미노루의 우울 시리즈 입문작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두더지]만큼 우울하진 않고, [심해어]보다는 덜 허무하며, 다양한 캐릭터가 잘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작에서 불쾌감을 느꼈다면, 더 이상 도전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또 반대로 본작에서 큰 재미를 느꼈다면, 아마 다른 작품은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짜임새가 좋은 만화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좋은 작품에는 좋은 제목이 있다. 개인적으로 [시가테라]는 뻔하지도, 그렇다고 추상적이지도 않은 훌륭한 제목이다. 자칫 일본어처럼 들리기도 하는 본작의 제목은 Ciguatera(시구아-테라), 열대와 아열대 해역에서 특정한 종류의 물고기를 먹어서 생기는 식중독의 일종을 뜻한다. 복어나 전갈의 독처럼 사망에 이르는 맹독은 아니고 설사나 구토와 같은 나름 약한(?) 증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일부 증상은 몇 주에서 몇 달까지 지속된다고 하는데, 물론 먹는 독소의 양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렇게 치명적인 놈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시가테라]일까. 식중독이나 해양 식물 따위는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 본작에서 시가테라는 무엇을 의미하나. 시가테라는 서로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하며 되어가는 서로가 바로 그 독이다. 주인공인 오기노를 포함하여 오기노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생성되는 모든 인물들과 만들어내는 일종의 케미스트리, 그것이 시가테라다.


여자친구인 나구모, 함께 괴롭힘을 받는 동료 다카오, 일진 타니와키, 타니와키의 여자친구 아키코, 타니와키를 죽이고 싶어 하는 숲의 이리, 원조교제를 하는 사카즈키, 함께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사이토, 사이토의 친구 킨조, 아르바이트 동료 코시, 코시의 여자친구 리츠코, 도시락집 매니저 니이바야시, 자칭 예술가 무라오카 등. 이 외에도 본작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엎치락뒤치락 얽히고설키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며 다양한 관계와 상황을 만들어낸다.

 

나구모 / 다카오
타니와키 / 아키코
숲의 이리 / 사카즈키 (절망적인 라인업)
사이토 / 킨조 (캐릭터를 진짜 열받게 잘 그린다)
코시 / 리츠코
니이바야시 / 무라오카

 

시가테라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설명은 바로 그 증상이다. 설사, 구토, 저림, 가려움, 더위와 추위에 대한 민감성, 어지러움, 허약 증세 등이 포함될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마치 인간이 "감당 가능한" 고문을 나열한 듯하다. 인간은 절대 혼자 살아갈 수 없고, 타인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것이 좋던, 싫던, 가볍던, 무겁던, 깊던, 얕던, 하나이던, 여럿이던,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든 간에 반드시 서로가 되어야 한다. 타인의 필요성은 영화 [캐스트 어웨이]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서로는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독을 생성한다. 완벽한 관계라는 것은 없다. 심지어 부모자식 간에도 독을 주고 받으며, 형제와는 물론이고, 부부 사이에서도 독은 만들어진다. 그러니 피를 나누지 않은 타인과 독을 생성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그리고 그 관계는 딱 인간이 감당 가능한 만큼의 독, 시가테라를 생성한다.

 

 

본작의 인물들도 그렇게 타인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시가테라에 의해 아파하고,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절망하고, 무기력해지고, 화를 내고, 울고 불고 난리들을 친다. 그들은 청소년에서 성인이 되는 그 애매한 간극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분노와 슬픔, 행복과 사랑을 느낀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그들의 혼란한 시기는 본작의 99%를 차지한다.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일상과 매번 다른 경로로 발생하는 사건사고, 끔찍한 사람과 괜찮은 사람, 최악의 관계와 최고의 관계, 물론 결말부에 가서 오기노와 나구로의 관계와 주변은 점차 안정되어 가지만, 여전히 후루야 미노루는 우리를 그렇게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다.

 

그리고 말 그대로 단 한 순간에 시가테라는 끝이 난다. 다른 말로 하면, 만화 [시가테라]에 등장하는 시가테라는 마지막에 가서 자취를 감춘다. 앞서 말했듯 시가테라가 유발하는 증상은 "견딜 수 있는 정도"다. 독에 내성이 생긴다는 것이 아니라 구토나 설사, 허약해짐 등의 생명에 지장을 주지 않는 고통에는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생길수록 점점 무뎌진다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처음 등장했을 때 우리의 반응과, 2023년 현재 우리의 반응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시가테라]는 그 무뎌짐을 오기노의 성장, 오기노가 어른이 되는 것으로 담아낸다.

 

 

다양한 인물과 만들어낸 다양한 케미스트리, 다양한 사건을 마주하며 생긴 다양한 내성. 각종 시가테라에 대한 면역이 생기고, 또 본인의 시가테라를 남에게 퍼뜨리기도 했던 오기노는 순식간에 어른이 된다. 나구로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던 오기노는, 야쿠자에게 목숨까지 위협받았던 오기노는, 친구에게 여자를 뺏기고 친구의 여자를 뺐었던 오기노는, 그의 표현대로 재미없는 녀석이 되어버렸다. 상사가 주절주절 설교를 해도, 여자친구가 질투를 해도, 별 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짓는 오기노의 표정은 마치 다 커버린 우리의 모습을 거울로 비춰주는 듯하다.


재미없는 녀석은 다른 말로 어른이다. 어른이 되어버린 오기노가 나구로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말하는 사랑이 진실일지, 거짓일지는 모른다. 어릴 때 내뱉던 사랑과 어른이 된 뒤 내뱉는 사랑은 같을까? 동심이 있고 경험이 없는 아이들은 진짜이고, 동심이 없고 경험이 많은 어른들은 가짜일까? 지금은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도, 오기노와 같은 방식으로 어른이 되었고, 또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이는 옳고, 어른은 틀릴까?

 

어린 시절의 오기노
어른이 된 오기노

 

무엇이 옳고 그르고는 없겠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어린 시절의 오기노가 외치는 사랑과 어른이 된 오기노가 외치는 사랑의 깊이가 다를지언정 내뱉는 사람은 같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그렇게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렇게 그렇게 살아간다. 시가테라에 울고불고 고통스러워하던 어린 시절의 나도, 시가테라 따위는 약간 거슬리는 몸살 정도일 뿐인 지금의 나도, 결국은 똑같은 나다.

 

[시가테라]는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질질 끄는 전개 없이 단 한 페이지만에 만화의 주인공을 오기노에서 독자로 옮겨버린다. 만화를 보고 있던 독자에게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시가테라를 추억하게 한다는 점에서 [시가테라]는 훌륭한 작품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적당한 분량, 다이나믹한 전개, 살아있는 캐릭터, 심도 있는 메시지, 센세이셔널한 결말. [시가테라]는 분명 훌륭한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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