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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 [잘 자 푼푼, 아사노 이니오] 만화리뷰

by jundoll 2021. 7. 18. 19:04

 

 

아사노 이니오 작가가 집필한

염세주의적인 특징이 잘 드러난 드라마 장르의 만화다.

 

이런 만화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리뷰를 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그림체? 스토리? 메시지? 배경? 캐릭터? 혹은 작가에 대해서? 고민하는 이유는 하나다. 뭐 하나 부족한 곳이 없는 명작이기 때문에. 에반게리온을 추천해줬던 친구가 두 번째로 건넨 만화는 바로 이 [잘 자 푼푼], 원어로 [오야스미 푼푼]이다. 이상하게 이름이 외워지지 않더라. -여자친구는 이를 오야스미 퐁퐁, 호호, 쿵쿵, 동동, 퉁퉁 등으로 계속 헷갈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만큼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스타일의 제목이기도 하고 전혀 주제가 예상되지 않는 모호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더 그렇다. 그러나 한 번 만화를 읽기 시작한 나는 단 이틀, 그것도 전날 밤에서 다음날의 낮으로 이어지는 그 짧은 반나절의 시간 동안 13권의 분량을 해치워 버리고 말았고 잘 외워지지 않던 이름은 이제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 가공할 흡입력을 가지고 있는 만화다. 이 괴랄한(나에게 있어 큰 칭찬) 만화는 어떻게 나를 요리했을까. 천천히 알아보자.

 

모든 문화 콘텐츠는 대중의 관심을 원한다. 그래서 그것이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자-알 생긴 '얼굴'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대중에게 더 효율적이게 자신을 각인시킬 수 있다. 그래서 움직이는 콘텐츠인 영화나 노래에 본작을 대표하는 포스터나 앨범커버가 있는 것이다.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보다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의 얼굴이 더 잘 각인되는 이유는 멈춰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포스터와 노래의 앨범커버는 복사된 지면에 멈춰있는 개체나 아트워크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화의 얼굴은 무엇일까. 만화는 앞의 둘과 달리 애초에 움직이지 않는 콘텐츠다. 그러니 당연히 만화는 따로 포스터나 커버에게 큰 역할을 맡기지 않는다. 콘텐츠와 함께 계속 얼굴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만화의 얼굴은 작화다. 이 만화를 다른 만화와 구분 지어 알아보게 하고 기억하게 하는 것은 단연코 작화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잘 자 푼푼]은 차은우급 얼굴을 가지고 있다. 완벽하다. 또, 다른 얼굴들과 비교할 수 없다. 선의 강도, 음영의 차이, 계속해서 뒤바뀌는 구도,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넘나드는 표현력, 감정을 모두 담아내는 표정 묘사, 장소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해주는 풍경 묘사, 대사와 죽이 척척 맞는 연출적 기법까지. 이 모든 작화적 강점들은 빼어난 전달력을 가지고 있어서 독자에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전달한다. 추천해준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그리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이제야 공감이 간다. 유니크한 그림 연출이다. 잘 그리는 작가는 많지만 이렇게 맛깔나게 그리는 작가는 처음 봤다. 살짝 더 오버하자면, 다른 것을 다 제외하고 작화 연출적인 측면만 보더라도 [잘 자 푼푼]은 이미 역사 속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특히 '영화 연출적 표현'은 매순간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만약 영화화를 기획한다면 그냥 이 만화책 속 장면을 그대로 움직이게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나는 분명 멈춰있는, 지면에 그려진,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장면들을 봤는데, 이것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내 머리에서 합쳐지면서 움직이는 GIF로 변해버렸다. 만화를 움직이게 했다니, 이건 어떤 의미로 연출의 오의에 도달한게 아닐까. 또, 이 만화에서 주인공 푼푼은 시종일관 '낙서된 새'의 모습으로 나온다. 푼푼의 얼굴을 모르는 독자는 그의 세밀한 표정과 몸짓을 알 수 없고 오로지 단순한 비언어적 행위나 내면 깊은 독백만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시각적 영향이 배제된 캐릭터를 보는 독자는 매 순간 자기 나름의 '푼푼 표정'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태에 놓인 것이다. 그리고 이때 쓰이는 얼굴은 당연히 내가 아는, 내가 상상한, 혹은 나 자신이 투영될 것이 분명하다. 내가 아는 얼굴은 그뿐이니까. 서사가 진행될수록 푼푼이 성장함과 동시에 그 얼굴은 적절하게 바뀌거나 혹은 정착하며 독자에게 더 깊게, 더 다양하게, 더 실제적이게 만화를 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획기적인, 그러나 살짝은 섬뜩한 기법이다. 이 만화를 보면서 비슷한 경험도 없는 나는 푼푼에게 자꾸 '나'를 이입시켰다. 아마 위와 같은 작화적 특성이 나를 작품 안으로 끌고 들어갔고, 그 안에서 푼푼이 되어버린 나는 그의 우울한 감정을 날것 그대로 느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당분간 여운이 사라지지 않겠지.

 

 

작화에 대해 줄기차게 늘어놓았으니 이젠 스토리와 메시지에 주목해볼까 한다. 전체적인 스토리는 굳이 한 줄로 표현하자면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 정도가 되려나. [잘 자, 푼푼]의 스토리는 당연히 푼푼과 그 주변인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들은 서로 엮이지 않은 듯 보이지만 치밀하게 엮여있기도 하다. 또한, 미시적으로 보면 다른 등장인물과 다른 상황으로 만들어진 개별적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결국 같은 맥락 속에서 일관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호수도, 강도, 시냇물도, 계곡도, 폭포도 결국은 다 물이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이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물'은 무엇이었을까. 워낙 심층적이고 어려운 메시지를 가진 작품이라 단어보단 문장이 잘 어울리겠지만, 나는 이 작품에 '받아들임'이라는 한 단어만을 사용하고 싶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이 자기가 계획한 대로 굴러가주길 바란다. 언제나 내가 계획하고 내가 상상한 대로 진행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아마 사람들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지 않았을 것이다. 슬픈 일을 계획하고 원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 보면 내가 원하지 않은 일들, 피하고 싶은 일들, 부정하고 싶은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계속 나쁘게만 굴러갈 때도 있다. 이유는 다양하지만 모든 이유들의 시작점으로 가보면 아마 '타인'이 있을 것이다. 세상에 지성체가 나 하나라면 아무도 나의 계획을 방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한 명이라도 타인이 생기는 순간 내 것과는 다른 생각, 즉 '의견'이 생기게 된다. 그 의견은 내 것과 다르기 때문에 나의 것과 100% 같을 수는 없다. 모든 논쟁과 토론, 다툼과 전쟁은 거기서부터, 바로 '타인의 존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많이도 싸워왔다. 몇 시간이고 의견을 조율하기도 하고, 때로는 갈라서기도 했다. 또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더는 못 참겠다며 거대한 폭탄을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긴 싸움을 이어오던 인류는 언젠가 깨닫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타인은 다 나와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해도 타인이라는 존재는 사라지지 않으니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만 나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쟤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쟤가 있다는 것을.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개인과 타인의 싸움은 서로가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점부터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국면에서 새로 태어난 것들이 법, 제도, 규칙, 문화다. 이런 합리적인 장치들은 개인의 생존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타인과의 공존을 위해 만들어진 구속장치다. 그러니 '타인' 없이는, '대화' 없이는, '받아들임' 없이는 반복되는 혼돈과 파멸만이 우리를 맞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만화의 주인공, 푼푼의 이야기를 해보자. 푼푼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타인이 내뱉은 말을, 자신의 추하고 더러운 생각을, 멋대로인 주변인들의 행동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성적이고 겁이 많은 성격을 갖고 있고 극단적인 상상으로 인해 과대망상적인 면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서 타인과의 해결점을 찾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20살이 넘어 성인이 될 때까지 자기 마음속에 있는 한 마디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부정적인 습관으로 폐쇄적인 인격이 형성된 것이다. 그 주변인들은 어떤가. 푼푼의 삼촌 유이치는 '자신의 가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푼푼의 어머니는 남편의 추락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또 푼푼의 첫사랑 아이코에게 학대를 가한 그녀의 어머니는 '타인'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고, 아이코와 자신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있었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코도 당연히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다. 이 '받아들이지 않는' 캐릭터들은 굉장히 부당한 일을 계속해서 겪거나 목숨을 쉽게 포기하기도 하고 남을 끔찍이 해하려고 하기도 한다. 그만큼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는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인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주어 연속된 불행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런 주변인들에게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낸 푼푼은 당연히 극도의 '받아들이지 않음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상대방의 발언도 그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대방의 호의에도 숨겨진 뜻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결국엔 자신의 처지마저 받아들이지 못하는 끔찍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거짓과 위선으로 얼룩진, 무력감과 패배감으로 뒤덮인 그런 인간이 되어버린 푼푼. 그러나 그에게도 분명 좋은 사람들과 훌륭한 기회들이 있었다. 삼촌의 아내가 그랬으며, 친구들이 그랬고, 부동산 아저씨가 그랬으며, 잠시 애인이었던 만화가 사치가 그랬다. 방금 언급한 그 '좋은 사람'들은 다들 훌륭한 캐릭터들이다. 여기서 훌륭한 캐릭터들이라 함은 무언가 자신을 짓누르는 압박을 받아들인 캐릭터라는 것이다. 이들은 역경을 딛었고 상대를 용서했으며 자기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였다. 이는 그들을 긍정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주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었다. 받아들임과 받아들이지 않음은 한 끗 차이지만 그것이 불러오는 결과는 인생의 방향에 영향을 줄 만큼 치명적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끝내 푼푼은 '남들의 시선에서 보면 그럴듯한' 결말을 맞게 되지만 지금 푼푼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주변인들은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습관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고 인생은 절대 예측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세상은 계속된다. 만화의 마지막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말이지만 어쨌든 세상은 흘러가기 마련이다. 내가 아프든, 슬프든, 고통스럽든, 죽어가든 세상은 무신경하게 흘러간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세상이 잠깐 멈추거나 날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간은 가고 사람들은 변한다. 다분히 차갑고 정없어 보이지만 그게 우리가 사는 현실이고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다. 세상은 나보다 더 큰 개념이기 때문에 바꾸려면 세상의 크기에 비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말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평생을 연구하고 끝없이 설파해야만 한다. 물론 그것도 아주 적은 가능성이 생길 뿐이지만. 어렵다. 어렵다는 말로 부족할 정도로 어렵다. 그러니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들과 '나'를 바꾸어 세상에 맞추는 사람들. 당연히 둘 중엔 더 작은 노력이 들어가는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기보단 '나'를 바꾸는 것이다. 나를 바꾸는 것은 나 하나 치의 노력만 들어가도 되니까. 그게 더 쉽고 더 합리적이고 더 편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받아들인다.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그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편하기 위해 선택한 '받아들이기'도 '바꾸기'에 비해 덜 힘들 뿐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사상이 무너지는 과정은 결코 한 인간이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아픔이 아니다. '바꾸기'는 굉장히 어렵지만 '받아들이기'는 너무도 아프다. 그리고 [잘 자 푼푼]은 그 받아들임에 있어서 겪는 한 인물의, 혹은 그 인물에게 투영된 우리들이 겪는 성장통에 대해 격렬하게 호소하는 작품이다.

 

말이 길었다. 좋은 작품엔 당연히 긴 말이 필요하다. 긴 말이 필요 없는 작품은 속이 비고 때깔만 고운 것이다. [잘 자 푼푼]의 분위기는 아주아주아주아주 어둡고 아주아주아주아주 우울하다. 좋게 말하면 여운이 남고 나쁘게 말하면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어둡고 신비로운 분위기만을 이용해 겉멋만 잔뜩 든 허수아비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분위기를 이용해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정확하게 그려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천하기가 어렵다. 이 만화를 추천해준 친구도 나니까 추천해줬다고 한다. 자랑이랄 건 없지만 작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없으면 보기 힘든 작품이다. 그리고 작품과 나의 경계를 확실히 구분 지을 수 있는 사람만이 봐야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좋은 경험을 했다. 한국어로 정발 되지 않은 만화라 일일이 번역을 했던 2015년도, 2016년도에 활동한 어떤 블로거와 이 만화를 추천해준 친구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잘 자 푼푼]

서사 ★★★
연출 ★★★★★
대사 ★★★★★
작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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