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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 [불과 피 1, GRRM] 도서리뷰

by jundoll 2024. 9. 10. 01:04

 

 

[불과 피]는 조지 R. R. 마틴의 장편소설로서 [얼음과 불의 노래] 보다 몇백년 전 타르가르옌 왕조의 이야기를 다룬다. [불과 피]는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타르가르옌 가문의 가언이기도 하다. 그들은 온갖 곳을 불태우고 정말 많은 피를 흘리기에 그 가언을 참 잘 지키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왕좌의 게임]을 본 사람들이라면 잘 아는 대너리스 타르가르옌의 선조들이 무더기로 나온다. 최근에 방영을 마친 [하우스 오브 드래곤]에서 나오는 그 은발머리 백인들, 바로 그들의 이야기다.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4개의 시즌에 걸쳐 [얼불노] 세계관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중에 하나인 용들의 춤을 다루는데, 이는 [불과 피] 2권에서 등장한다. [불과 피] 1권에서는 발라리아의 드래곤군주 가문들 중 하나였던 타르가르옌의 정복자 아에곤이 웨스테로스로 넘어와 어떻게 이 대륙을 정복해 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아들인 잔혹왕 마에고르, 아에니스, 아에니스의 아들인 재해리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특히 재해리스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오래 살았다)

 

불과 피 2권에 나올 등장인물들

 

나는 살면서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 같은 판타지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딱히 끌리지도 않고 철학서나 전공과 관련된 디자인, 예술 책이 더 유용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불과 피]를 읽으면서 판타지 소설의 재미를 알았다. 이건 아마 GRRM(조지 마틴 옹의 이름을 약자로 쓴 것)의 집필 스타일이 나와 맞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몇백명이 넘어가는 등장인물과 광활한 대륙, 그 하나하나에 부여되는 이야기와 미치도록 치밀한 설정들. 이름은 다소 헷갈리지만, 그래도 그런 것들 쯤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다들 금방 죽기 때문에..)

 

 

이 끔찍한 가계도를 보시라. 우리가 [왕좌의 게임]에서 봤던 대너리스는 저~ 밑에 아래서 두번째 줄에나 겨우 배치되어 있다. 나는 이렇게 정리한 사람도 대단하지만 애초에 이 캐릭터들을 창조한 GRRM에게 정말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불과 피] 1권에서 이 방대한 인원이 다 나오는 것은 아니고, 세번째 줄 정도까지만 나온다.

 

방대한 인원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이름이다. 웨스테로스 대륙, 그러니까 우리가 잘 아는 스타크, 라니스터, 그레이조이, 티렐 등의 대가문들이 있는 그 대륙은 정복자 아에곤이 상륙한 뒤로 세상이 뒤집혔다. 가장 크고 강한 드래곤인 발레리온을 타고 전국투어를 돌며 모든 가문의 항복을 받아낸 아에곤은 그 대륙의 모든 사람이 아는 최고 권력자였던 것이다. 따라서 아에곤은 타르가르옌 가문에서 가장 명예로운 이름이다. 그래서 그런지 틈만 나면 자식 이름을 아에곤으로 짓는다. 자식이 셋 이상인 놈들은 웬만하면 아에곤 하나씩 껴 있는 수준이다. (위의 가계도에 아에곤 이라는 이름만 11개가 나온다.)

 

이 정도는 감수 할 수 있다고 방금 생각했는가? 이제 조금씩 다른 이름이 최소한 50개는 나온다. 아에곤을 필두로 아에몬, 아에몬드, 가에곤 등의 변화구가 있고, 아에몬을 필두로 가에몬, 바에몬, 다에론, 마엘로르, 바엘론, 발레리온, 마에고르, 마에카르, 라엘라, 비세라, 마에겔, 사에라, 가엘 등 진짜 끝도 없이 비슷한 이름이 나온다. 이정도면 알파벳을 쭉 늘어놓고 하나씩 바꾸면서 바에곤.. 합격. 자에곤.. 탈락. 사에곤.. 합격. 카에곤.. 탈락. 이런 식으로 바꿔 끼우면서 괜찮다 싶으면 적용시킨 게 아닐까?

 

아에곤 타르가르옌과 두 누이 비세니아와 라에니스

 

그래도 이 방대한 캐릭터나 똑같고 비슷한 이름들의 철벽수비를 뚫는다면 이제 재미는 보장되어 있다. GRRM은 설정이나 캐릭터도 잘 만들지만, 이야기를 가장 잘 만든다. 특히 1권은 세 개의 주된 이야기로 진행되는데, 정복자 아에곤의 웨스테로스 정복기, 잔혹왕 마에고르가 파멸하는 이야기, 그리고 마에고르가 개판 5분 전으로 만들어 놓은 세상을 다시 살만하게 만드는 조정자 재해리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정복자 아에곤과 재해리스의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재해리스가 선한 왕비 알리산느와 (남매지만) 결혼하기 위해 갖은 수를 써가며 현명하게 대처하는 모습에서 역시 왕이건 천민이건 기사건 귀족이건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인가 싶었다. 중간에 마에고르의 이야기는 특히 자극적이어서 취향이 조금 갈릴지도 모르겠다.

 

판타지 소설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왕좌의 게임]이나 [하우스 오브 드래곤]을 재밌게 봤다면 필히 이 소설도 재밌게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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