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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인사이드 르윈, 코엔 형제] 영화리뷰

by jundoll 2021. 8. 22. 02:58

 

 

코엔 형제가 연출하고

오스카 아이작, 캐리 멀리건 등이 연기한다.

 

[인사이드 르윈]은 기타 하나 매고 별 일을 다 겪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 음악 장르의 영화이다. 드라마 장르라면 당연히 내러티브가 좋아야 하고, 음악 장르라면 당연히 음악이 좋아야 한다. 둘 다 잘하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은데 여기 둘 다 훌륭히 해내는 영화가 있다. 우선 음악이 정말 너무 좋다. 오스카 아이작이 직접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며 연기했다고 하는데 그냥 가수다 가수. 노래를 정말 잘하고 배역에 찰떡같이 어울린다. 뭐 누구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하는데 거기까진 모르겠고 내가 본 오스카 아이작은 '르윈 데이비스'라는 가수 그 자체였다. 오스카 아이작 이라는 이름보다 르윈 데이비스가 더 잘 어울릴 지경이니까 말이다. 

 

본격적으로 영화 이야기를 하기 전에 번역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고 싶다. [인사이드 르윈]이라는 제목은 애초에 번역을 한 것도 아니면서 괜히 말을 줄여 놨다. 원제인 Inside Llewyn Davis는 영화에 나오는 르윈의 앨범 이름이다. 물론 원제 그대로 개봉할 순 없겠지만 [인사이드 르윈]이라고 하면 원제가 가진 의미인 앨범 재킷 같은 게 아니라 '르윈의 속마음'이나 '르윈의 내면', '르윈의 이야기'처럼 해석되기 때문이다. 꼬우면 네가 지으라고 하면 할 말 없다. 다만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영화를 접하는 사람들의 배려를 조금 더 해주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뿐이다. 

 

 

영화의 색감에 대해 먼저 말하고 싶다. 이 영화는 -물론 위의 사진은 흑백으로 처리했지만- 희미하게 푸른 톤으로 뒤덮여있다. 처음 영화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내내 푸르스름한 기운이 가시질 않는다. 물론 계절이 겨울이기도 하지만 그 계절이 가진 찬 속성에 힘을 보태려는 듯 칠해진 푸른 색감은 영화 속 르윈의 처량한 신세를 더 강조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물체나 사람의 형상이 그리 또렷하게 보이지가 않는다. 담배 연기와 클럽의 어두운 조명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영화 내내 화면은 아주 조금이지만 눈앞이 뿌연 듯, 눈에 눈물이 고여 당장이라도 흐를 듯 불명확하게 표현된다. 물론 그와 역설적이게 르윈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지만 말이다. 눈보라가 치는 날씨와 흐린 시야의 푸르름, 그리고 그에 온몸으로 맞서듯 반항적인 인물의 태도. 이와 같은 표현적 마찰로 인해 그 드라마는 더 짙은 분위기를 풍기게 된다.

 

영화는 처음부터 르윈의 삶을 아주 적나라하게 비춘다. 함께 듀엣으로 활동하던 친구는 자살했고, 친구의 아내를 임신시켰다. 또 소속사는 전혀 도와주질 않고 재능 있는 신예들은 자꾸 치고 올라온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의 상태는 좋지 않으며 르윈 본인은 잘 곳 조차 보장되지 않았다. 거기에 하룻밤 신세 졌던 친한 교수님의 고양이는 잃어버렸고 교수님이 초대한 식사 자리에서 교수님의 지인들과 마찰을 빚었다. 더 설명하자면 다섯 줄은 더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고난은 이어진다. 정말 불쌍하기도 이리 불쌍할 수가 없다. 그는 과거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다. 듀엣으로 활동했던 친구, 마이크의 죽음 이후 모든 것은 뒤틀리고 망가지며 부서져버렸다. 교수님과의 식사 자리에서 마이크의 파트를 무심결에 불렀던 교수님의 아내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장면은 그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지만 그의 마음속이 얼마나 뭉개져 있을지 가늠케 한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망가진 그의 인생은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계속된다. 슬슬 영화의 메시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쯤 감독은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이 불행한 연대기를 마무리짓는다.

 

 

영화는 클럽에서 노래를 마치고 나온 르윈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누군지 모를 남자에게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하면서 시작된다. 어떠한 정보도 없다. 그저 대사 몇 마디와 아파 보이는 르윈의 단말마뿐이다. 그리고는 영화는 아무 일 없다는 듯-아주 아주 불행한- 르윈의 일대기를 보여준다. 결말부 전까지. 결말부의 르윈은 또다시 누군지 모를 남자에게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한다. 시작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우리는 그 남자가 누군지 대충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남자는 르윈이 행패를 부렸던 공연에서 미숙하지만 열심히 노래를 부르던 할머니의 남편이었다. 그러니까 그 남자는 그저 아내의 복수를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영화는 수미상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앞과 뒤가 같다는 것이다. 앞과 뒤가 같다는 것은 앞에서 뒤까지 일어났던 일이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도돌이표처럼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르윈의 삶은 마치 겪었던 일을 다시 겪은 것처럼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코엔 형제는 이런 삶의 반복성과 연속성을 어둡고 우울한 색채와 흡입력 있는 드라마, 인물의 심정을 대변하는 노래들로 우리에게 훌륭히 전달하고 있다. 

 

누구나 성공할 순 없다. 누군가 성공했다면 슬프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누군가는 실패했다. 1위가 있다는 것은 당연히 2위와 3위, 그 밑의 셀 수 없이 많은 경쟁자가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다른 영화가 모두 1위를 조명할 때 남겨진 이들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최고가 되고 싶지만 타협은 하기 싫고, 포기하고 싶지만 포기할 수 없는 2위들의 삶을, 혹은 2위조차 될 수 없었던 이들의 끝없는 도전과 방황, 고통과 사랑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는 어설프게 따듯한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괜히 그 마음을 이해하는 척 섣불리 어깨를 감싸주지 않는다. 오히려 멀리서 슬픔을 방관하고 그 끝이 어딜지 끝까지 주시한다. 그리고 아주 뼈아프게도 우리가 사는 진짜 삶이 그렇다. 속된 말로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건 속된 말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사실이다.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도 흔쾌히 도와주지 않고 아무도 쉽게 넘어가 주지 않는다. 계속 반복될 것이고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진짜 마지막, 최종 씬에서 그 메시지는 가장 확실하게 다가온다. 자신을 폭행한 남자가 탄 택시의 뒷모습을 보며 르윈은 나지막이 Au Revoir! 라고 나지막이 외친다. 번역하면 "또 봐". 그러니까 이 영화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와 같은 '삶의 속살'은 우리가 숨 쉬며 살아있는 한 계속 반복될 것이니 그저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아프니까 그저 받아들이라니. 그렇게 힘겹게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나 할 법한 말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그보다 더 실용적인 말도 없다. 르윈같이 모든 게 안 풀리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힘내고 더 즐겁게 살아보라고 하는 게 더 불가능한 주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면 위선을 모두 걷어낸 가장 솔직한, 최선의 위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영화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언젠가 영화광인 친구에게 가장 좋아하는 미국 감독이 누구냐고 물은 적이 있었고 친구는 한 시의 망설임 없이 '코엔 형제'의 이름을 읊었다. [인사이드 르윈]은 친구가 나에게 나중에 시간 되면 꼭 보라고 했던 영화 중의 하나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Inside Llewyn Davis]

서사 ★★★★★
연출 ★★★★★
대사 ★★★★☆
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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